평 균 (고후 8: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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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삶은 한마디로 세상과 합류하지 않기 위해 사탄과 싸워야 하는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그도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듯이 돌이 떡되게 하는 일에 매진했을 것이고 또 그런 삶에 아무런 갈등도 느끼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세상에 합류하거나 타협할 수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사탄과의 갈등 속에 살아가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길을 간다고 하는 신자로 살아가는 것도 세상과의 갈등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을 살다보면 신앙이라는 것이 거추장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신앙만 아니라면 적당히 양심도 속이면서 편하게 살 수 있을 일도 그렇지 못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분명히 성경에는 우리의 참된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떡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는 말씀보다는 떡이 더 필요하고 떡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보니 말씀과 떡이라는 관계가 우리에게 갈등구조로 형성이 되어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때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떡이 필요 없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떡이 필요함을 아셨고, 또 이런 말씀을 하시면 분명히 듣는 자에게는 크나큰 갈등으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잘 아시면서도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곧 떡입니다. 성공과 발전이 떡입니다. 그리고 이 속에서 사탄은 우리를 향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이 떡이 되게 해보라'고 유혹합니다. 목사로서 목회 성공을 해서 능력을 발휘해보라고 하고, 사업가로서 성공해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열심히 하고 능력이 있으면 그 결과가 나타나게 되어 있으니까 너도 한번 열심히 하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 보라고 유혹합니다. 이러한 풍조 때문에 이 사회는 모든 것을 능력으로 판가름합니다. 성공하면 능력자요 성공하지 못하면 무능력자로 낙인찍힙니다.

능력만 있으면 무엇이든 거둘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능력을 얻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더군다나 사탄은 신자에게 '너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 있지 않느냐?'라고 유혹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멋있게 성공해서 예수 잘 믿으면 이렇게 성공한다는 것을 보여주라고 합니다. 결국 이러한 사탄이 유혹에 넘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능력에 목말라 하면서 돌을 떡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 자녀로서의 능력인줄로 착각하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성장논리에 빠져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사탄을 쫓아가는 것임을 모른 채 믿는다고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교회다운 교회는 성장한 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콩나물 자라듯 쑥쑥 커가는 교회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능력이 충만한 교회로 보여집니다. 조그만 교회는 교회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목사가 게으르고 교인들이 열심이 없어서 교회가 그 모양이라고 질책을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면 되는데 안해서 그렇다고 게으름을 나무라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교회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지난 주일에 이어서 어려운 교회를 도와주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내용을 단지 어려운 교회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으로만 받아들이면 돈많은 큰 교회는 기살리고 돈 없는 작은 교회는 기죽이는 말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구제를 해도 돈많은 교회가 더 많이 하지 돈 없는 교회가 구제를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려운 교회를 돕자는 사랑실천 캠페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형제된 신자가 모이는 교회는 얼마나 소중한 모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구제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구제를 어려운 사람 돕기 위해서 교회가 돈을 좀 내놔라는 식으로 이해해 버린다면 그것은 세상사람들이 하는 구제와 다를 바가 전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구제는 나는 있는데 저 사람은 없으니까 내가 좀 도와주자는 차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서로 도와가며 살자는 것이 세상이 말하는 구제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구제에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결과는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이 가게 되지만 목적은 전혀 다릅니다.

성경에서의 구제는 신자는 땅에 애착을 두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의 것을 바라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것에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돈이 없이도 기죽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느냐를 묻는 것이 구제입니다. 또 돈이 있다고 해도 돈에 인생 걸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느냐를 묻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세상은 자본주의 사회로서 능력 모든 것을 좌우합니다. 누가 더 능력이 있는가를 경쟁하는 사회이고 성장여부를 가지고 능력을 판가름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능력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은혜이기 때문에 경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장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은혜일 뿐입니다. 그런데 만약 교회에서 은혜를 말하면서도 서로의 능력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해서 경쟁하고 싸운다면 그것이 곧 교회가 교회를 무시하는 처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공로로 돌리고 하나님의 은혜에만 감사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는 경쟁이 없고 억눌린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이고 참으로 소중한 교회임을 말하기 위해서 본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11,12절을 보면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연보를 할 때 있거든 하고 없으면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없는데도 받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제의 목적은 헌금이 얼마가 나왔으냐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은 언제나 얼마나 나왔으냐에 모든 관심을 집중합니다. 많이 나오면 그만큼 교회가 신앙이 좋은 것이고, 적게 나오면 신앙이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없는데도 빚을 내서라도 헌금하는 것이 믿음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런 믿음에는 분명히 갚아주신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교인들을 유혹합니다.

교인들은 교인들대로 헌금을 못하면 창피스럽고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헌금을 해서 교회에서 인정을 받고자 합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를 무시하고 있는 교회 아닌 모습입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있으면 하고 없으면 하지 말라고 합니다. 헌금이 얼마가 나오든 그것은 개의치 않습니다. 헌금 액수가 관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느냐입니다. 헌금은 있으면 하고 없으면 안하면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헌금을 한다면 헌금으로 자기 의를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설령 형편이 어려워서 헌금을 못한다고 해도 조금도 창피스러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는 누구나 동일 할 수밖에 없는 교회인 것입니다.

13,14절에 보면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평균케하기 위해서 구제한다고 말합니다. 평균이란 서로 같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말이 있는 사람은 있는 것을 다 남에게 주어서 다른 사람과 같아져야 한다는 뜻입니까?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소유가 평균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애당초부터 누구에게는 많이 주고 누구에게는 적게 주는 것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균의 뜻은 15절의 말씀을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15절"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말이 어디에 나옵니까? 출 16:18절에 보면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음식이 없다고 원망했을 때 그들이 보지도 못하고 먹어보지도 못한 하늘의 음식인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만나는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도록 각기 식량대로 거두도록 하였습니다. 결국 만나는 하늘 나라는 이런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늘의 음식이었습니다.

세상은 능력이 있는 사람은 많이 남기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부족하게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하지 않는 하늘 나라를 소망으로 삽니다. 그 하늘나라 방식을 세상에서 교회로 모이면서 보여라는 것입니다.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음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노력과 상관이 없이 주어졌습니다. 그 만나가 남는 것도 부족함도 없이 주어진 것은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방식과 같이 자기 노력으로 많은 남기기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내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 능력이 앞서게 되면 결국 남기기 위해서 힘쓰게 되고 남는 것은 내것이라는 소유욕이 발생하게 됩니다. 내것이라는 소유욕이 있을 때 평균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평균은 모든 신자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앞세우고 나올 때 가능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에 욕심을 내어서 더 거두었을 때 그것은 썩어 버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내 능력과 힘으로 살아갈 때 그 결과는 모두 썩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을 때 헌금하면서 교만하지 않을 것이고, 또 가난해서 헌금을 못한다고 해도 자존심 상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이고, 적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평균이고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마음이 살아있는 참된 교회입니다. 은석교회가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