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주신 마음 (고후 8: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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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 총각이 결혼할 때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은 '좋은 남자' '좋은 여자'입니다. 목사에게 중매 서달라고 요구할 때도 '어디 좋은 남자 없어요? 좋은 여자 없습니까?'라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반문하는 것은 '뭐가 좋은 남자인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좋은 남자 좋은 여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합니까. 물론 나름대로 좋은 남자, 좋은 여자에 대한 기준이 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기준일 뿐입니다. 자기가 바라보는 시각에서 좋은 사람이지, 내가 좋다고 해서 결코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는 좋은 사람이라고, 이 사람과 같이 산다면 행복할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결혼해놓고는 얼마 못가서 '속았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모든 사람의 결혼 생활이다. '속았다'라고 하면서도 정 때문에 살아가지는 것이 결혼생활입니다.

'속았다'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변한 것이 아니라 애당초 자기가 상대방을 바라보았던 기준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기준에 미달하지 못한 것이지 사람이 달라진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만 미처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잘안다고 사귀었지만 결국 내가 몰랐던 부분이 보여지게 됩니다. 그것이 보여질 때 '속았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어렵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잘 압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저를 잘압니까?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자기 생각과 기준에 의해서 상대방을 판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는 좋은 것이 저 사람에게는 나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가령 조용한 성격을 좋아하는 사람은 활달하고 시끄러운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활달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좋게 보이게 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제 눈만큼만 보이고 제 수준만큼만 알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시각을 가지고 어떻게 우리가 사람을 안다고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학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것도 인간의 눈과 수준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 분인데 인간은 온통 땅의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겨우 깨달아 봐야 땅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가짜 하나님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고향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안다고 해봐야 눈에 보이는 육신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누구인지, 직업이 무엇인지, 나이가 얼마인지, 형제가 누구인지, 겨우 이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안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는데 크나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잘 안다고 하는 한쪽 면 때문에 보이지 않는 다른 쪽을 배척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그의 지혜에는 감탄하고 놀라와하면서도 그 지혜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까맣게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고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면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이 예수님의 지혜에는 놀라워하면서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지 못한 것은 그들의 시각이 땅을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 상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는 메시아가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그리스도안의 형제가 형제를 바라볼 때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디도를 칭찬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디도라는 인간 자체를 칭찬하고 내세운 것이 아닙니다. 16절을 보면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디도에게서 자신과 같은 마음을 발견합니다. 바울과 같은 마음이란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즉 바울은 디도에게서도 고린도 교회에 대한 사랑을 발견한 것입니다. 또 17절에 "저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라는 말씀을 보면 디도의 열심은 간절함이었고 자원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디도를 통해서 누구에게 감사합니까? 하나님께 하고 있습니다. 디도에게 이런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땅을 바라보며 사는 인간의 시각과,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인간의 시각의 차이점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는 신자들을 바라볼 때 주위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아무개 집사님은 참 열심입니다. 우리 교회 기둥입니다'라고 칭찬할 것입니다. 저도 교회에서 신앙적인 모습을 보이는 분이 있으면 마음속으로라도 그분을 칭찬했고 그분이 대단하다고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사도 바울의 말은 저에게도 날카로운 칼이 되어서 날아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가 자기와 같은 마음으로 간절함으로 자원해서 고린도 교회에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디도의 마음이 하나님이 주신 마음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서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형제를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바울이 디도에게서 자기 같은 마음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것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랑으로 일하는 것도 역시 하나님이 주신 마음으로 바라보고 감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는 모두가 인간적인 조건을 바라보는 인간적 시각에서 맺어지는 관계입니다. 때문에 자기에게 이로우면 좋았다가 해가 되면 금방 틀어지고 맙니다. 이것이 땅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간관계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에서는 서로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며 사는 것을 보고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은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기 때문에 그 마음으로 형제 됨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또 한사람의 형제를 알게 되었다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나의 동무로, 나의 동역자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동무란 같은 마음을 가진 친구이고, 동역자란 같은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동역자란 목사가 같은 목사를 가리켜서 부르는 말이 아닙니다. 동역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고 간절함과 자원함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모든 형제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으로 살아가시고 자원함으로 형제를 위해서 봉사하며 살아가신다면 여러분은 저의 동무요 동역자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서 세상적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발견했을 때 하나님께 그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도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디도에게 자원하는 열심과 수고하는 겸손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을 고린도 교회들에게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바울이 형제를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세상적인 조건을 보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조건을 보게 되면 결국 자기 유익을 헤아리게 됩니다. '저 사람이 우리 교회에 유익이 되느냐 안되느냐?'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평가된 것에 의해서 각기 다르게 대우하게 됩니다. 이것이 땅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형제를 판단하는 시각과 수준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갈 때 여러분의 눈에 비춰지는 형제는 모두 세상적인 시각과 기준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세상과 육신적인 조건을 가지고 형제를 판단하기 때문에 무시할 자와 대우할 자가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찾고자 애쓰며 살아갈 때 여러분에게는 하늘의 것이 보여지게 됩니다. 형제에게서도 하나님이 주신 마음만 보여질 뿐입니다. 그럴 때 같은 마음을 가진 형제를 찾은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귀한 동무, 동역자를 얻은 것이 됩니다.

교회는 모두가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와 성도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목사와 성도가 구분되어 있는 교회는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은석교회는 오직 하늘의 것을 찾아 헤매이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의 조건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서로에게서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와 같은 동역자를 발견함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해야 할 하나님의 일입니다.

간절함과 자원함으로 수고하는 형제를 통해서 자신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겸손의 마음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을 보지 마시고 디도를 디도 되게 하신 하나님을 보십시오.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만드신 하나님을 보십시오. 내가 나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형제를 대했는지 돌아보시고 오직 하나님만 찾는 간절함으로 형제를 만나는 은석교회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