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의 의미 (고후 9: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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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뭔가 '하라'는 말씀이 있을 때 사람들이 드러내는 나쁜 버릇은 '그것을 했을 때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이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짜로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소중한 것을 내어놓고 바쳤을 때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돈에 대해서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으로서는 돈을 바치라는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 대신에 차라리 몸으로 때우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으로 돈을 안내는 불안감을 해소해 보려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끄집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목사는 돈을 낼 수밖에 없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기도 합니다. 결국 돈을 가운데 두고 교인과 목사가 서로 줄다리기하는 작태들이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헌금과 연관된 성경구절을 목사에게 아주 좋은 무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역시 그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6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는 말씀이 목사에게는 기쁨의 구절로 돈을 내기 싫어하는 교인에게는 부담 가는 말로 들려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 하나만을 가지고 헌금을 축복과 연관지어서 생각해 버립니다. '뿌리는 것에 비례해서 거둔다'라는 잘못된 생각을 앞세워서 헌금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자기 멋대로 약속해 버립니다. 많이 바치는 사람은 그 만큼 많은 것으로 보상을 받지만 적게 바치는 사람은 아꼈다고 해서 그것이 모아지지도 않을 것이고 되돌아오는 것도 적어서 항상 가난하다는 말로 엄포를 놓습니다. 결국 이러한 목사의 말에 마음이 흔들리고 갈등을 겪은 교인들은 '혹시'하는 불안감에서 바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을 뒤에 이어 나오는 7절의 말씀이 부정을 해버립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헌금 액수의 많고 적음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정한대로 하고,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고, 즐겨내는 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헌금의 액수는 우리에게 맡겨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헌금을 내는 우리의 마음을 보실 뿐입니다. 100원짜리 동전이라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겁게 내는 헌금이라면 하나님은 그 헌금이 아니라 마음을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는 것은 100원짜리 동전은 안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색함은 이웃과 나누기 싫은 마음에서 억지로 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주위의 눈치 때문에 내는 것이나,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고 과시하게 위해서 바치는 것들은 모두가 인색함으로 하는 것이 됩니다.
행 20:35절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한 말씀을 보면 많은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복의 개념을 무너뜨리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오늘 본문에 헌금을 하나님의 은혜로 말하는 것 역시 은혜의 개념을 무너뜨리는 말씀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복이나 은혜에 대한 상식은 내가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뭔가를 잘한 것에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복이고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본문에서는 헌금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자기식으로 이해하기를 헌금을 하면 한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갚아주기 때문에 주는 것이 복이 되고 헌금이 은혜가 된다고 말해버립니다. 마치 던지면 다시 자기에게 돌아오는 부메랑처럼 내가 바친 헌금이 더 많은 복이 되어서 부메랑처럼 나에게 돌아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까지 내 이익만큼은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인간의 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죄성이 교회를 물질주의로 기복주의로 만들어 가버린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마치 돈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돈이 있어야 교회가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사단의 하수인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이루어집니다. 만약 은석교회가 돈이 없어서 문을 닫게 되었다면 그것은 은석교회가 문닫은 것이지 하나님의 나라가 문을 닫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관심을 교회에 두고 있기 때문에 돈에 민감하게 되고 돈이 있으면 마음이 놓이고 돈이 없으면 마음이 불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돈에 관심을 쏟게되면 그순간부터 멸망으로 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에 관심을 쏟을 때 그것이 곧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가 돈만 열심히 바치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여겨주고, 다된 것으로 말하는 것은 영생을 돈 받고 파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돈바친 자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어서 바친 자로서의 기쁨을 보장해주는 사이비 종교단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격한 표현을 쓰는 것을 나무라지 마십시오. 격한 표현을 쓴 것이 한 두번이 아니지만 워낙 많은 교회들이 그리스도를 돈에 팔아먹고, 십자가와 돈을 맞바꾸고 있으면서 교회라고 주장하고, 부흥했다고 거들먹거리면서 많은 사람들은 멸망으로 끌고 가고 있기 때문에 표현이 거칠어지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연보를 미리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연보의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연보 하는 신자의 마음 자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미리 준비하는 것은 6절에 적게 심고 많이 심는 것으로 연결 지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설명하겠습니다.
앞서 말하기를 연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의 전부인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라고도 말했습니다. 이것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복을 누리고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그 마음이 풍성해져 있다면 얼마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것으로 남과 나눌 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희생입니다. 이 본질을 누가 나타낼 수 있습니까? 희생이 내가 하겠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입니까? 희생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는 자에게서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속에 가득 채워진 주님의 희생이 나로 하여금 희생할 수 있는 자리로 가도록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에게서 이웃과 나누는 연보가 보여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축복과 아무 상관없이 이미 무한한 복을 받아 누리고 있기 때문에,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서슴없이, 아까운 마음 없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연보이고 즐겨내는 연보입니다. 마음에 정한대로 하고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연보는 은혜 있는 사람이 은혜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주는 것입니다. 줄 수 있다는 것은 뭔가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넘치기 때문에 생명을 나누어 줄 수 있고, 예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이지 없는 돈을 억지로 바치라는 뜻이 아닙니다. 헌금은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럴 때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