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종 (고후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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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의 무력함은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힘조차도 자기에게 없음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잠 16:32절에는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함으로서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다스릴 수 없는 상황을 주장함으로서 자신의 정당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가령 '아이 우유 값이 없어서 아이가 굶게 되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우유를 훔쳤다'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이것은 실제로 신문에 기사화되었던 이야기입니다. 언뜻 듣기에는 타당하고 얼마든지 인정해 줄 수 있는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고 그 상황을 이겨나간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상황의 정당성은 똑같은 상황에 처한 모든 인간들이 같은 행동을 보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가 다른 행동을 보일 때 상황의 정당성은 주장할 수 없게 됩니다. 저 사람은 당신과 같은 상황에서도 도둑질을 하지 않는데 당신은 왜 하느냐는 말앞에서는 할말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이냐가 아니라 그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자신의 행동입니다. 즉 상황이 그를 도둑질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내가 부족할 때 남의 것을 훔쳐서라도 부족을 채우고 싶어하는 인간성이 그 상황 속에서 행동으로 드러난 것뿐입니다.

남자들이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고 나서 꼭 핑계 대는 것은 자기 아내입니다. 화장도 안하고, 옷도 아무렇게나 입고, 세련되지 못한 그 모습이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을 주장함으로서 자기의 정당성을 말하지만 이것도 역시 잘못된 말입니다. 만약 아내가 화장도 안하고 세련되지 못해서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렸다면 모든 남자에게 이러한 상황이 그대로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세련되지 못하고 못생긴 아내와 살면서도 자기 아내만 사랑하는 남자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가 세련되지 못하고 못생겨서 다른 여자에게 눈 돌린 것이 아니라 남자 안에 있던 바람기가 상황에 맞추어서 드러난 것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는 도둑질을 안했기 때문에 도둑질을 한 사람을 나무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 안에도 그들과 똑같은 인간성이 숨어 있습니다. 우린 단지 체면과 양심, 도덕성 등이 어울려져서 참았을 뿐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하게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이 죽을 몸에서 건져주실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 속에 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을 알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자기를 생명으로 인도하실 분임을 믿게 되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의 가르침이 복음으로 들려질 수 있을 것이고, 주님께 복종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5,6절에 보면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은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복종,이라는 말을 합니다. 보통 '복종'이라고 하면 권위 앞에서의 눌림을 연상하게 됩니다. 힘있는 자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복종은 힘있는 자앞에 대한 굴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있고 권력 있는 사람에게 굴복하는 것은 행동의 복종을 말합니다. 복종하지 않았을 때 돌아올 불이익이 두려워서 복종하는 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종이 아닙니다. 비록 행동은 복종하고 있다고 해도 마음은 복종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장이라고 해서 밑의 직원에게 큰소리칠 때 비록 그 앞에서는 다소곳이 말을 듣지만 마음속으로는 '돈이 좋다'라고 하면서 불복종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종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은 복종하기 싫은 것을 할 수 없이 복종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이미 복종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 생각까지도, 내 상식까지도 모두 그리스도에게 복종되어지는 것입니다.

5절에 모든 이론을 파하고,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고 말씀합니다. 복종이 어려운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론, 상식, 자기 생각,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게 복종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내 상식과 내 생각으로 안산다는 것입니다. 가령 '돈을 사랑하지 말아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돈이 있어야 살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그리스도께 복종치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죽는다'라고 할 때 '하나님은 사랑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을 죽일 수 있는가?'라고 하는 것도 역시 자기 상식과 생각을 파하지 못함으로서 그리스도께 복종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건강하든 건강치 못하든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으로 감사하면 되는데, 건강하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둔다면 역시 그리스도께 복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상식과, 자기 생각과,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것들을 파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복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애당초부터 그리스도에게 복종할 마음도 없이 나왔기 때문에 복종하라는 말이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다만 그리스도를 믿으면 자기에게 복이 된다는 말에만 귀를 기울일 뿐입니다.

1절에 보면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되었을 때 나타난 것은 자기를 공격하는 자들에게 대해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나타낸 것입니다. 2절에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라는 말을 보면 바울에 대해서 잘못된 선전을 하는 무리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사람들을 대할 때에 자기 육체대로 대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에게 복종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눅 23:34절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입니다. 그리고 행 7:60절에 보면 스데반이 설교를 마치고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모습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이 자신을 비방하고 헐뜯는 자들을 육체대로 대하지 않고 온유와 관용으로 대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께 복종케 되어진 결과로서 나타난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병기였습니다.

바울의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돈, 권력, 지식, 직책, 이런 것들이 바울의 병기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병기는 그리스도께 복종케 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육체로 하면 모든 것이 힘들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결국 마지못해서 하는 일들이 대부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복종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여러분 자신의 생각과 이론을 끄집어 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상식으로,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복종이고 온유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복종이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 위에 굳게 설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자기의 육체대로 싸우려고 하지 마시고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인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복종케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주님께 복종해 버리면 쉬운데 육체로 행하고 육체대로 싸우려고 하니까 신앙생활이 힘이 드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비방하고 헐뜯는 사람들 앞에 육체대로 싸우지 않았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 같으면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을 드러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복종하는 자와 복종하지 않는 자의 차이인 것입니다. 내 자존심과 내 힘을 병기로 내세우기 때문에 다툼이 끊이지 않고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을 병기로 내세운다면 다툼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온유와 관용이 나타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