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과 칭찬 (고후 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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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 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즉 성령이 임하셔서 새사람이 되지 않으면 자기를 바라보면서 자신이 한 일을 흐뭇하게 여기고 그것을 보람으로 삼고 자랑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랑을 정당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즉 뭐든지 주안에서 자랑하면 괜찮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을 오해하기를 뭐든지 주님이 도우셨다고 하면서 자랑하면 옳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것은 끝까지 자기 자랑을 포기하지 못한 인간이, 자랑의 욕망을 풀어놓으면서도 성경이라는 법망에 걸리지 않을 돌파구를 찾아가는 얄팍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령 '내가 IMF시대여서 수입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십일조를 줄이지 않고 예전 그대로 했더니 주님이 도우셔서 수입을 예전에 십일조 하기 전보다 훨씬 많도록 해주셨다 나는 이것을 통해서 주님의 능력을 배우게 되었다'라고 할 때 사람들은 이것을 주안에서 하는 자랑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결국 자기 믿음과 돈 많이 번 것에 대한 자랑을 주님의 능력이라는 말에 실어서 내보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안에서 자랑하라는 것은, 주안에서 자랑할 것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다보니까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더라는 의미입니다. 즉 주님 안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자랑거리인데 주님 안에서 십자가의 희생을 생각하고 나를 바라보니 모든 것이 다 가치 없는 것이고 자랑할 수 없는 것들이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안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신자에게서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신자가 주안에 있을 때에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아는 인간이 그 일을 자기가 한 일로 가로채서 자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국 자랑하는 사람들은 배후에서 하나님이 일하신 것에 대해서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자기가 한 일로 가로채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도우셨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꼭 그 앞에는 하나님이 도우실만한 자격을 갖추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아무나 도우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가장 기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사람이 가로채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자랑하도록 하고 칭찬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랑을 재미로 삼고 살아가고 칭찬 받기를 좋아하며 사는 것은 사단에 붙잡힌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단은 세상에서 하나님에 의한 승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씁니다.

옛날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을 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웠습니다. 인간의 싸움은 창칼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지만 이스라엘의 싸움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 싸우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의 승리이지 다윗의 승리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다윗을 죽임으로 여호와의 승리의 흔적을 지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하면서 다윗을 높이고 칭찬했을 때 사울은 시기와 질투 속에서 다윗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사울을 통해서 다윗을 죽이고자 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자들이 자랑에 끌려가고 칭찬 받는 재미에 끌려가는 것은 하나님의 승리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사단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적은 그런 인간을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인간으로 바꿔 놓고야 합니다.

그러나 사단도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인간에게 자기를 내세우라고 속삭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 대신 인간의 일함을 자랑하라고 부추깁니다. 하나님의 열심 대신 인간의 열심을 내세우라고 부추깁니다. 하나님이 희생하신 피대신에 인간이 희생한 피를 내세우라고 부추깁니다. 교회를 위해서 희생한 것, 봉사하면서 희생한 것, 구제하고 선교하면서 희생한 것, 자기 희생을 포기하지 말고 자랑하고 내세우라고 속삭입니다. 남들보다 고생했는데 고생한 것만큼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할 것이 아니냐고 유혹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러한 사단에게 빠진 채 내가 한 일에 대해서 모른척하지 말고 칭찬도 해주고 가치를 부여해 달라고 신에게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심에 대한 흔적을 지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7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라고 하면서 자랑과 칭찬이라는 것 자체가 외모만 바라보고 있는 인간의 한계에서 발생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외모를 보지 않겠다고 해서 외모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외모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려고 힘쓰고, 그 주님만 우리들의 마음에 살아 계신다면 외모의 가치는 자연적으로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보지 않은 채 외모를 보지 않고자 하는 것은 외모를 보지 않음으로서 또 하나의 차원 높은 믿음을 제조하고 그 믿음으로 자신의 신앙적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발상임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수단과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칭찬의 대상이 되어보고자 애를 씁니다. 믿음 때문에 고생한 것을 자랑하거나, 주님 때문에 포기한 것을 자랑하는 모든 것이 믿음을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흔히 목사가 고생한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도 고생담을 통해서 목사라는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목사다운 목사, 성공한 목사, 사랑이 많은 목사, 이런 외모를 통해서 칭찬 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바울다움은 편지를 통해서 이미 드러났습니다. 10절에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편지를 받아 보았을 때는 바울이 말씀에 힘이 있고 권외와 엄격함이 있는 사도다운 사람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만났을 때는 몸이 볼품이 없고 말도 시원치 않은 것으로 인해서 편지를 통해서 생각했던 사도다움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외모로 사도다움을 판단한 것입니다. 사도다움은 외모가 아니라 말씀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고린도인들은 외모로서 사도다움을 평가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이 외모를 가지고 자랑하고 칭찬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바울은 11절에서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자가 어떠한 자이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자도 그와 같은 자인줄 알라"고 합니다. 즉 편지를 보고 생각했던 바울이나 직접 만나 본 바울이나 같은 바울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모 때문에 생각이 달라진다는 것은 결국 외모로서 사람을 헤아리는 지혜 없는 것임을 말합니다.

18절에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는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외모를 자랑하고 외모로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결국 마귀의 시험에 빠져 있음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옳다 인정을 받는 자는 주님이 칭찬하는 자라고 말씀했는데, 그렇다면 과연 누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자입니까?

그는 일단 외모를 보지 않는 자입니다. 그리고 13절부터 말한 대로 하나님이 나눠주신 분량 밖의 자랑거리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외모를 자랑하고 외모로 칭찬 받고 싶어할 때는 항상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것 밖의 것을 부러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항상 주님이 주신 것 안에서 주님만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갔습니다. 매를 맞든 욕을 먹고 의심을 받든 그것을 자기에게 주어진 분량으로 여기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듣는 것입니다. 신자는 언제나 나를 자랑하고 칭찬을 듣기 위해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셨음을 드러내는 자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