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의 열심 (고후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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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교회에서는 목사를 스승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마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런가 봅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목사에게서 성경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일서 2:27절에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성령이 친히 성도를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스승이 둘 일수는 없습니다. 오직 한 분이 성도를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성도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등장한다면 그 앞에서 목사는 스승이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목사는 스승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목사를 스승이라고 해버리면 결국 성령과 동격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버립니다.

때문에 오늘날 교회들이 목사를 스승이라고 말하고, 또 교인들 스스로도 목사에게서 배운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스승을 오직 성령으로만 인정합니다. 그런데 만약 자기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자가 따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결국 성령이 스승이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 영이신 성령이 자기를 가르친다는 것을 누가 쉽게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사도들같이 계시를 따라 받는 것도 아니고, 성령이 가르칠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성령이 나를 가르치니까 나는 사람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생각이 내 생각인지 아니면 성령의 생각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래서 결국 눈에 보이는 목사에게 가르침 받고 목사에게 묻고 살아감으로서 그 해결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가르친다는 것을 믿지 못한 자는 성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도나 목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사실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사도나 목사의 가르침이란 성도를 가르쳐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증거해서 누가 참된 성도인가를 구분해 내는 증인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도 아닌 사람을 제자 훈련 시켜서 성도로 만들어 내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그 어떤 인간에게도 부여하신 적이 없습니다. 진정한 가르침이란 바른 말씀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바른 말씀을 사도나 목사를 통해서 증거할 때 그에 대한 판단은 성도 안에 함께 하시는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말씀이 증거된 자리에서는 성령 안에 함께 하고 있는 신자들이 서로 아멘하고 화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도들의 말솜씨나 말재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의 말재주에 이끌려서 흔들리는 사람은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다. 성령은 말솜씨나 말재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바른 복음으로만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혹 어떤 목사가 성경을 해석할 때 감탄스러울 만큼 깊이 있고 정확하게 복음을 드러내는 해석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서 감탄하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그럴 경우 성도는 그 목사를 통해서 계시를 바르게 해석해 주시는 성령님께 감탄하고 감사해야 하고, 또 그 바른 복음을 듣고 이해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신 자기 속에 계신 성령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가르치시는 분은 오직 성령이시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깨달을 자가 없고 알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른 복음이 드러나고 있는 그 자리는 성령이 함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목사는 성도에게 명령하고 지시할 자격이 없습니다. 성도는 성령이 명령하고 지시하시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단지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목사를 스승으로 여기고 떠받드는 일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자신을 중매하는 사람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에 앞서 1절에서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앞에서 자기를 칭찬하고 자랑하는 것을 어리석고 지혜 없는 것으로 말한 바울이 다시 자기를 칭찬하는 듯한 말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용납하라는 의미의 말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고린도 교인들이 정결한 처녀로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려지는 것에 있었습니다. 정결한 처녀란 흠이 없는 깨끗한 처녀를 뜻합니다. 흠이 없는 깨끗한 처녀란 3절에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 있는 것'입니다. 즉 뱀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와 같이 마귀의 유혹 속에 사는 것은 부패한 마음을 가진 처녀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성도 사이에 마귀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힘쓰는 것은 마귀로 인해서 막혀 있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하나되게 해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려지는 신부로서 영원토록 한 몸으로 살게 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인을 잘 가르쳐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제자 훈련을 한답시고 성도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그 내면을 보면 철저하게 자신의 교회에 봉사하고 충성하며 자신만을 추종하는 종으로 만들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가 성도에게 할 일을 앞서 말한 대로 복음을 증거해서 상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종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대로 정결한 처녀로서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에게 오직 예수님만을 전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말하면서 그것만 바라보고 주님께로 나갈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중매입니다. 그리스도 한 분만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한 분만 보지 않고 재산이 얼마인지 월급이 얼마인지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지, 이런 것을 보게 될 때 결국 그 중매는 허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힘쓰는 것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소망하는 진실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사는 성도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성도를 바라볼 때 안타까운 것은 못먹고 못사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유혹 때문에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지 못하고 다른 세상의 것을 함께 바라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하나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 이것 하나만 바라보지 못하고 자꾸 나에게 주어질 유익과 편안함을 같이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부로 주님과 하나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마귀에게 미혹 받은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중매하는 것은 마귀에게 미혹되어서 본래 인간의 자리를 벗어난 채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본래 인간으로 돌아가야 하는 문제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마귀이고, 마귀에게 미혹된 사람들이 누군가가 다른 예수를 전하고 다른 복음을 전해도 그것을 용납하고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평신도는 성경을 잘 알지도 못하는데 목사가 바르게 전하는지 잘못 전하는지 어떻게 아는가? 전하면 전한 대로 믿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라고 하면서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는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짜 성경을 알지 못해서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복음을 전하고 다른 예수를 전하는 가짜 목사의 말이 자기 마음에 들기 때문에 뭔가 성경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도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 자신들부터 세상을 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신앙으로 말씀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도 좋지만 세상도 포기하지 못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기 때문에 비록 다른 복음이라고 해도 자기를 좋게 하고 자기 기분에 맞는 말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국 평소에 신앙이 없이 말로만 '예수 예수'하고 살았다는 것이 가짜 목사가 다른 복음을 전함으로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에게 미혹된 채 부패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처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성도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하기 위해서 힘써서 복음을 증거한 것 같이 목사인 저도 사도 바울의 마음이 주어져서 오직 여러분을 그리스도께 중매하기 위해서 힘쓰는 자 되기를 원합니다. 성도인 여러분이 할 일은 목사에게서 다른 복음이 증거될 때 그 목사를 용납하지 않고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복음을 용납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 아니라 마귀와 하나되어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고생하는 것은 죄인으로서 당연한 결과입니다. 고생안하는 길을 찾아 헤매이지 마시고 고생하면서도 즐거움과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는 길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 길이 곧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으로 족한 줄 알고 예수 안에서 예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고 기뻐하는 자 되고 싶어하는 것, 이것이 정결한 신부로서 그리스도께 드려지는 처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