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의 일군 (고후 1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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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한 거짓 사도가 있음을 말하고, 14절에서 사단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15절에서 사단의 일군들이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많이 혼란스러워 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누가 거짓 사도이고, 누가 참된 그리스도의 사도냐는 것입니다. 누가 의의 일군으로 가장한 사단의 일군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이 신자들의 혼란스러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한국교회가 이단이라고 규정한 단체가 아니라면 일단 모두를 교회로 인정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면 모두가 의의 일군이라고 인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누가 거짓사도이고, 사단의 일군인지는 사도 바울이 명백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사도 바울이 자신이 하는 일을 중매로 비유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울은 신자를 그리스도에게 정결한 처녀로 드리기 위해서 중매한다고 했습니다. 신자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에 떠나있지 않도록 힘쓰는 것이 자기의 할 일로 언급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의 일군은 말 그대를 그리스도를 위한 일군으로서 신자를 정결한 신부로서 그리스도에게만 드리기 위해 힘쓰는 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만 그리스도를 앞세우고 나머지는 모두 세상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일군을 가장한 사단의 일군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일군을 판단할 때는 저 사람이 과연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밀어붙이는지 아니면 세상 복을 말하면서 세상으로 밀어붙이고, 교회 봉사를 말하면서 교회로 밀어붙이고, 목사 대접을 말하면서 목사 자신에게 끌어당기는지의 여부를 보면 됩니다. 만약 그리스도를 가장해서 그리스도외에 다른 것으로 밀어붙인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사단의 일군입니다. 제 아무리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고 도덕과 윤리가 뛰어난 목사라 하더라도 그리스도 아닌 것을 내세우면 사단의 일군이고 거짓 사도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거짓 사도라고 해서 흉측한 얼굴을 하고 도덕도 없고 볼품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이런 오해를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 대해서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말합니다. 사탄은 드라큘라 같이 검은 망토를 입고 입가에 피를 흘리고 뾰족한 송곳니가 길게 나있는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거룩한 예복을 입고 마치 천사처럼 입가에 자애로운 미소를 띄고 나타나는 신앙의 탈을 쓴 종교적인 사단임을 알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사단이 말씀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단에게 시험 당하신 것을 보면, 돌을 떡이 되게 하라는 유혹에 말씀으로 응대했을 때 사단도 같이 말씀을 인용해서 유혹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 4:6절에 보면 사단의 두 번째 시험은 예수님을 거룩한 도시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라고 하면서 시편의 말씀을 인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단의 교묘한 점은 말씀으로 살겠다고 한 사람을 말씀으로 시험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한 사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험합니다. 그래서 사단의 시험을 분별하기를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단이 말씀을 인용해서 시험을 하는 것만 봐도 이런 사단이 교회 속에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시험했던 사단은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목회자에게는 서울이 그를 유혹하는 거룩한 도시일 수 있고, 수만 수십만을 자랑하는 교회가 그를 유혹하는 거룩한 곳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서 자기가 가장 목사다운 목사이고 능력이 있는 목사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기사와 이적에 골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사단이 말씀을 인용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문자적인 해석입니다. 문자적인 해석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진리를 보이는 것으로 현실 속에서 나타내고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말씀으로 유혹하는 사단의 역사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이런 유혹에 빠져서 말씀을 증명하고 실제로 체험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지 모릅니다.

만약 예수님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갔다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됨과 능력 있음을 드러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많은 사람들의 환호성과 환영에 우쭐거리면서 종교적 사기꾼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을 가장한 많은 자들이 바로 그런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 소위 성령운동이라는 것이 바로 사단의 유혹에 빠져서 영적인 진리를 눈에 보이는 능력으로 증명해 보이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인용한 시편의 말씀에는 뛰어 내리라는 문구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뛰어 내리라는 문구를 삽입합니다. 말씀의 본래의 뜻을 왜곡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성경 본문을 읽어 놓고 본문과 무관한 말만 늘어놓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또 자기들의 사업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서, 교회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광고하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멋대로 인용하는 것도 같은 작태인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볼 때 말씀을 빙자하고 말씀을 앞세워서 신자를 유혹하여 자신의 의도와 목표를 위해서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빙자한 거짓 사도이고 의의 일군을 빙자한 사단의 일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를 정결한 신부로 그리스도께 드리기 위해서 중매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자기를 위한 일이 아니고 신자가 그리스도와 한몸 되어지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은 욕을 먹고 오해를 받는다할지라도 신자의 유익을 위해서 힘썼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오해를 받든 욕을 먹든 그것에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다 아신다(11절)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보시는가가 문제이지 사람이 어떻게 보는가에는 마음을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사도는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의 시선에 더 관심을 둡니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가장과 위선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자 또한 하나님보다도 사람의 시선에 관심을 두고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것은 결국 사단의 시험에 들어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자기에 대한 오해가 복음에 걸림돌이 될 때는 적극 해명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7절에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다른 사도들보다 못하다고 하는 비판에 대해서 상대방을 높이기 위해서 자신이 낮아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8,9절에서 고린도 교회에서 돈을 받기를 거절한 것은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이고 다른 교회에서 이미 받았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 짐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지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의 모든 행동은 오직 고린도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스스로 낮은 자리로, 고생하는 자리로 들어갔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진짜 사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거짓 사도는 자기 이익만 챙기고 자신이 대접받고 자신이 높임 받는 것만 생각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자들도 상대방을 높이기 위해서 내가 낮은 자리로 들어가고 이웃의 이익을 위해서 내가 고생하는 자리로 들어가는 그리스도 진리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신자의 마땅한 태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목적은 높임 받고 귀하게 여김 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누가 잘사느냐가 아니라 누가 말씀대로 살아가느냐 입니다. 사단이 광명한 천사로 가장해서 여러분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때, 말씀을 기억하고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어떻게 사는 것이 참 성도의 모습인가를 기억하십시오. 비록 세상에서 높임 받지 못하고 무시 받으며 환영받지 못한다고 해도 여러분의 속에 있는 진리만큼은 포기하지 마시고, 여러분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증거되어지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