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납하지 말 것 (고후 11: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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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에 이스라엘이란 집단이 형성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진행되어진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만드시고 의도하신 것은 그들만 천국에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된 하나님을 잃어버린 채 거짓된 신을 찾아 섬기는 세상의 죄악 됨을 심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의도를 두고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하나하나 점검해 볼 때 이스라엘은 자기의 구원을 앞세우고 구원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담아 드러내는 그릇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냄으로서 세상의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줘야 했고, 때문에 이스라엘의 삶은 분명 세상 사람들의 삶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다른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세상의 거짓된 신을 용납하지 말고 자기 생존을 위해서 신을 찾지 말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옛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데 실패하고 세상 사람들과 합류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셨던 참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이루시고 그 피를 중심으로 모여진 남은 자,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행하신 삶의 하나하나는 세상을 고발하고 심판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믿음 없음에 대한 경고였고, 거짓 신에 정신 팔려서 참된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조차 두지 않고 살아가는 현실에 대해서 책망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바로 세상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증거입니다. 세상이 참된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가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욕을 하고, 비웃고, 창으로 찌르던 그 무리들 속에 바로 우리들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십자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복된 삶이 아니지만 적어도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들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복안에 자신이 이끌려 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로 모여진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즉 새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옛날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것이 그대로 교회에 요구되어짐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예배당을 세우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세상의 죄를 고발하라고 세워졌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커지고 발전하는 것으로 세상의 죄를 심판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음으로서 세상 죄를 심판 할 수 있습니까? 교회는 죄를 보여줌으로서 심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즉 교회만큼은 죄와 다르게 살아감으로서 세상이 죄가운데 놓여 있음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가 할 일은 세상의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위장한 채 교회에 침투하는 세상의 세력을 단호하게 끊어버려야 합니다. 거짓 세력이 교회를 침투하는데도 그것을 거절치 못하고 용납하는 것은 교회를 보호하기보다는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도도 이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사도의 마음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사단의 일군'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단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의로 가장을 하고 나타납니다. 착하고 경건하게 보이고 믿음이 좋게 보이는 모습으로 가장한 채 사람들 앞에 나타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그들을 목자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사람들 앞에 바울은 자신도 어리석은 일이긴 하지만 자기를 조금 자랑해야 하겠다고 말합니다(16-18). 외적인 조건을 가지고 사도의 여부를 판단하는 고린도 교회의 잘못된 시각을 책망하기 위해서 배설물로 여기는 자신의 외적인 조건을 할 수 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울이 참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오해하고 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면서도,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사도를 가장한 거짓 목자를 용납하고 환영하는 것에 대해서 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적인 조건이 좋다고 해서 무조건 참된 그리스도의 종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에 대해서 나무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나무람을 오늘날 한국교회가 받아야 할 것입니다. 목사를 받아들일 때 믿음이 어떠한가? 복음이 어떠한가를 보는 교회가 참으로 드뭅니다. 성경이나 복음은 목사에게는 기본적인 것이라는 인식 때문에 출신 학교와 유학의 여부 등을 기준으로 삼고 목사를 받아들입니다. 더구나 큰 교회일수록 자기 교회에 걸맞은 목사를 골라야 한다는 생각으로 외적인 조건들을 많이 요구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거짓 목자를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19,20절을 보면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구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의의 일군으로 가장한 사단의 일군, 즉 거짓 사도를 용납하는 교회를 향해하는 책망입니다. 정결함으로 순수하게 말씀만 사모해야 할 교회가 거짓 사도를 분별하지 못하고 용납한다면 그것은 교회도 정결함과 순수에서 떠나있다는 증거이고, 거짓사도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사의 가르침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가르침 속에 교인들까지 잘못된 길로 가게 되고 방탕과 타락과 허무한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잘못 가르친 목사만 아니라 그를 용납한 사람까지 멸망의 구렁텅이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목사가 무슨 소리해도 나만 바르게 하나님을 믿으면 되지'라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많은 분들이 이런 생각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만 '그것은 아니다 잘못된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바르게 사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르게 한다고 해도 거짓된 것을 거짓이라고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복음보다도 내가 더 소중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교회를 위하고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공격적이고 사랑이 없는 태도가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끝까지 자기에게 해가 되는 것은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이 과연 공격적이었고 사랑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까? 예수님은 다만 이것이 복음이다는 것만 드러낸 것입니다. 교회가 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복음이 아닌 반대편에 있던 자들은 자연히 자기들을 공격하고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세력을 동원해서 상대방을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복음을 말하고 참된 구원의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하나하나 제거하면서 교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아닌 것을 거부하지 못하고 용납한다면 결국 그리스도의 길이 가려지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교회가 살기 위해서 거짓된 목자를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이 아닌 거짓 복음을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철저하게 거부하고 쫓아내야 하는 것이 진리를 생명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교회를 내 교회로 여기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로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정신이지 결코 나 자신이 아닙니다. 은석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를 생명으로 여기고 거짓된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교회로 모여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