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의 고난 (고후 11: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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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에 인간은 주님의 고통을 밟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이 흘린 피를 밟고 살아가고 있고, 주님이 하고 있는 기도 덕분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이것을 얼마나 의식을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 덕분에 내가 살고 있다는 생각을 얼마나 합니까? 사실 우리는 주님의 고통, 희생 때문에 내가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까? 기도할 때마다 주님의 은혜를 들먹이고, 십자가를 들먹이지만 그것은 요식행위에 불과하고, 사실은 자신의 환상 속에서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관심이 자기의 꿈을 이루는 것에 쏠려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나 때문에 고생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누군가 고생 때문에 내가 누리게 된 혜택이나 이익을 즐길 뿐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을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평과 불만 속에 살게 되는 것도 자신의 욕심에 갇힌 채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현재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지를 잊어버린 결과입니다. 신자는 우리가 욕심에 매여서 나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내 믿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모든 일 속에서 주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고통과 희생 덕분에 살아가고 있음을 아는 교회라면 오직 주님의 피만 강조할 것입니다. 십자가만 강조하고 그 십자가를 흐리게 하고 가리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잘라내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을 훼방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가 아닌 다른 것을 강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데 전혀 지장이 없고, 그리스도의 피는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은혜의 통로를 따로 마련해 놓은 채 교인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문제로 고민하고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키우고 목회를 성공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염려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2,23절에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고 말합니다. 즉 육체적인 조건을 가지고 사도의 여부를 판단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그런 육체적인 조건이라면 나도 할말이 있다고 합니다. 육체적인 조건 때문에 대우를 받는다면 나도 얼마든지 대우받을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조건으로 대우를 받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의 일군이 아님을 말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바울은 어리석은 말이지만 자신이 복음을 전하면서 겪었던 고통을 얘기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참된 그리스도의 일군이란 외형적인 조건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외적인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판단하는 것은 정신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진짜 그리스도의 일군은 복음 때문이라면 어떤 고통과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아야 합니다. 즉 자기 편함과 이익과 대우받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일군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음을 앞세워서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만 급급합니다. 자연히 복음이 고통과 희생을 요구할 때는 거절해 버립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요구한 길이라면 그것이 설사 죽음의 길이라고 할지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한 고통과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 누구 때문입니까? 교회를 위해서였습니다. 28절에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염려는 교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자기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교회에 대한 염려로 가득한 것이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일군의 마음입니다. 교회가 커지고 작아지는 이것이 염려거리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위에 바로 서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교회 되는 문제가 바울의 염려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고생과 고통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복음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모든 힘을 쏟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아는 바울을 통해서 나타나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마음을 아십니까? 십자가의 희생을 아십니까? 그 희생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여러분을 고생과 희생의 길로 인도할 때 순종할 마음은 있습니까? 아는 것과 사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아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사는 것은 온전히 성령에 다스림 받는 신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제각기 자기 유익을 추구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일군은 자신의 유익보다는 자기의 희생으로 얻어지는 이웃의 유익을 더 추구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부자 장로나 일 많이 하는 사람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들이 교회라는 인간 단체는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복음을 위해서 고생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신자에 의해서 유지됩니다. 그분들에 의해서 교회가 교회답게 유지되는 됩니다. 그들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일군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참된 그리스도의 일군이 그립습니다. 우리 모두 부끄러움을 가져야 할 줄 압니다. 일군이 못되면서 일군인 척 했던 것, 목사도 못되면서도 목사인 척 했던 것, 신자도 못되면서 신자인 척 하면서 교회를 훼방했던 우리 자신을 부끄러워합시다. 그리고 우리를 지탱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피의 희생을 다시 한번 마음에 두면서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일 수 있는 일군 되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교회가 교회 되어지기 위해서 자신을 버렸습니다. 매맞아도 괜찮고 옥에 갇혀도 괜찮고 굶어도 괜찮고 춥고 헐벗어도 괜찮았습니다. 다시 한번 자기를 생각하고 사랑으로 살지 못했던 우리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를 위해서 나 자신의 수고와 고통은 감수할 줄 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기에 힘쓰는 신자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