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함과 강함 (고후 12:1-10)
9806142429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증거는 하나님이 거부하고 싫어하시는 것을 고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기쁨이 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거부하고 말씀을 싫어한다는 증거 역시 말씀이 인간을 거부하고 부정할 때 그 말씀에 순종치 않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대할 때 바른 태도는 말씀은 항상 나를 부정하고 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결코 나를 옳다고 하고 옹호해주지 않음을 아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말씀 앞에서 자기 자존심 싸움을 합니다. 자기 지식을 자기 자존심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을 포기하는 것을 내가 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끝까지 우기려고 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보다는 자기 자존심을 더 높이 여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잘못된 태도는 특히 목사들에게서 많이 보여집니다.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자기 신학을 자기 힘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자신의 신학의 잘못됨을 인정하는 것은 곧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고, 패배는 곧 약자의 모습이기 때문에 강자로 남기 위해서 끝까지 자기 신학을 고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곧 말씀에 관심이 없고 생명에 관심이 없고 하나님께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고 산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말씀은 곧 생명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대할 때는 오직 영원한 생명에만 관심을 둬야 합니다. 그럴 때 말씀이 현재의 자기 신학을 부정하고 나를 공격한다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자신의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학자로서 자존심이 상하고, 목사로서 창피스럽다는 생각이 든다고 할지라도 그것보다는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라면 얼마든지 자기는 포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자존심을 세우고자하는 것은 강자로 남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약자 되기 싫어하고 높은 자리에서 높임 받고 싶어하는 탐욕의 증거입니다. 물론 세상은 강한 자가 높임을 받고 행세할 수 있습니다. 약자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기펴지 못하고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강한 것이 하늘나라에서도 강한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약한 것이 하늘에서도 약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천국 가는 데는 세상의 힘이 전혀 어떤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강한 힘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자기 힘을 믿지 천국을 믿지 않을 위험이 많습니다. 반대로 약한 자는 세상에서 힘없이 살기 때문에 힘으로 살아가지 않고 천대받는 것이 없는 천국을 더 그리워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상급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강한 힘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이 천국에서조차 힘을 가진 자로 살겠다는 악한 발상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에서 상급이 없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결국 약자가 되기 싫어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전혀 반대의 말을 합니다. 5절에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또 9절에서도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한다고 말하고, 10절에서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11:30절에서도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합니다. 바울의 자랑거리는 '내가 약한 자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강한 힘이 있어야 기죽지 않고 사람 구실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강한 힘이 자랑거리인 이 세상에서 자기의 약함을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습니까? 약함을 자랑한다는 것은 힘을 부러워하지 않고 기죽지 않고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과연 그렇게 사십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누구를 찾아가셨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약한 자, 천대받고 무시 받는 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약자의 자리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약자를 찾으신 이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은 상한 심령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는 것도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세상의 성공을 자기 마음에 가득 채움으로 기쁨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들은 내게 기쁨이 되는 것이 하나님께도 기쁨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일이 있으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슬픔의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대학 떨어지면 영광을 가리는 것이고, 합격하면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대학도 일류 대학일수록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모르고 있는 악한 인간의 죄의 실체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셋째 하늘, 즉 천국에 이끌려간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천국을 경험한 사람이 그것조차도 자기를 위한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겠다고 합니다. 오직 자랑거리는 자기의 약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자기 약함을 자랑하는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강함입니다. 내가 약해질 때 드러나는 것은 주님의 강함이라면 반대로 나의 강함으로 내세울 때 가려지는 것은 주님의 강함이 됩니다. 때문에 약한 것을 자랑하라는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강함을 자랑하라는 뜻이 됩니다. 9절에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하는 말씀을 보면 바울이 약함을 자랑함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에게 머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느껴지는 사람은 자기의 약함을 깊이 깨달은 사람입니다. 나는 내세울 것도 없고, 못났고, 자랑할 것도 없는 보잘것없는 인간이다는 것을 알수록 나같은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인간의 종교로 전락되어 있습니다. 이런 세태 속에서 여러분에게 분명히 있어야 할 것은 참된 기독교가 어떤 것인가를 새롭게 세우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힘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힘을 보태주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오히려 약함을 추구합니다. 약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내가 천국가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하고 감사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는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드러나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에게 좋은 일이 있고 기쁜 일이 있는 것을 은혜라고 하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은혜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 욕심으로 살고 있는 증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약한 것을 자랑하고 은혜만 자랑하는 사람은 세상 것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실망할 수밖에 없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그 순간이 주님의 은혜에 더 깊이 빠져 들어갈 수 있는 기회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로 하나님을 아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자랑할 것이 없고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서 입을 열 수 없을 때, 그때가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순간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약한 자로 만드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통해서 주님의 강함과 능력을 보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를 약한 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7절에서 바울의 육체에 가시, 즉 사단의 사자를 주신 것도 너무 자고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라는 말씀을 보면 결국 바울은 자신의 병까지도 은혜로 여겼다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은 자랑거리가 없다는 것 때문에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은혜가 무엇인가를 아는 신자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