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게 하는 자 (고후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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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교회라는 것을 쉽고 단순하게 생각해 버리지만 사실 교회는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단체입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고정적으로 생각해 버리고 사회에 대한 어떤 역할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생각하게 되지만 사실 교회라는 것은 고정적이 아니며 항상 말씀의 현장에서 새롭게 교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말씀이 떨어진 그 장소에서 교회가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잘했습니다'라든가 '앞으로 잘할께요' 가 소용없이 지금 그 사람이 말씀을 수용할 때 신자로 확인되는 것이고 교회로 확인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수용한다는 것은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새사람이란 옛것을 수리하고 고쳐서 새롭게 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옛것을 아예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채워진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옛사람이 새사람으로 되었다는 것도 우리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옛사람은 하나님이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반면 새사람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날 때부터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기가 신이 되어서 살고자 하는 본성으로 태어납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누구의 설득이나 설명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설득하고 설명해서 교회는 나오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습도 보이지 않고 그 어디에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시각적이고 과학적인 증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억지로 설명하고 증거를 제시하려고 하다보니까 이상한 자기 체험과 경험이 튀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누가 어떤 체험을 했다고 해도 거기에 매료되지 마십시오. 아무개가 꿈에 예수님을 봤다더라, 아무개는 천국을 봤다더라, 아무개는 마귀를 볼 수 있다고 하더라는 얘기를 들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도 저런 체험을 해봤으면'하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뭔가 평범한 것은 믿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게 되고, 따라서 좀더 자극적이고 특이한 체험을 원하게 되고 그런 체험을 줄 수 있는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유혹에 빠져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이상할 정도로 평범한 것입니다. 신자가 달라졌다는 것도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만으로 마음 든든하고 기뻐하는 사람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것 때문에 어떤 일속에서도 두렵지가 않고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는 사람으로 된 것이 신자의 달라진 모습입니다. 이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신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도 기쁨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도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과연 사도 바울은 자신의 기쁨을 어떤 식으로 나타내고 나누어주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기쁨이란 나혼자 기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전달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기쁨이 주어졌으면 그 기쁨을 사용하는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알았으면 그 은혜를 사용하는 인생이 되어야 하고, 사랑을 알았으면 사랑을 사용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로 가기로한 계획을 변경하게 된 것에 대해서 자신은 하나님의 경영에 대해서 '예'할 수밖에 없음에 대해서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것이지 결코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생각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그와 같이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행동한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23절에 보면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 가지 않기로 한 것은 결코 바울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을 아끼는 마음에서라고 말합니다. 만약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아끼는 마음이 없이 자신의 계획대로 고린도를 방문했더라면 그들에게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결과만 가져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벌을 받아야 할만큼 바울을 근심케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찾아가서 죄지은 자를 징계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서로에게 근심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스스로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편지를 보내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24절 말씀과 같이 그들의 믿음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들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기 위해서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모든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신의 기쁨을 사용하고자 대했던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근심거리가 되지 않고 기쁨이 되고자 하는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2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은 말씀인데 풀이하면 이런 뜻입니다. 신자의 기쁨은 불신자를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하나님을 믿는 신자를 통해서 얻습니다. 즉 신자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어주어야 하는 관계인 것입니다. 나를 기쁘게 해 줄 사람은 바로 내 형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형제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나를 기쁘게 해줄 사람에게 아픔을 주는 것이 되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3절에서도 바울은 자신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해서 그들의 잘못에 대해서 책망할 때 자기에게 기쁨을 주는 고린도 교인들을 도리어 근심케 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방문을 취소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관계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염려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 때문에 자신에게 근심이 된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인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서로 근심거리가 된 것이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더욱 많은 근심에 잠길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염려하고 용서하고 사랑을 나타낼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용서하라고 한 것은 벌받은 사람이 구원에서 멀어질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잘못을 한 사람이 벌을 받았을 때 아마 양심의 가책을 받고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용서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죄 때문에 교회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에게 속는 것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 합니다. 사단의 궤계라는 것은 신자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이 되고 미안해하면서 스스로 '나는 교회에 나갈 자격이 없다'라고 여기게 하고 교회로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고 감추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두움을 좋아합니다. 어두움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어주고 드러나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거의 대다수의 범죄가 밤에 일어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자기의 죄를 감추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는데 교회에서 누군가의 잘못을 책망만 하고 위로하고 용서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 사람을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책망했으면 용서하고 위로함으로서 원래의 기쁨으로 살아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형제인데 근심에 빠지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항상 형제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려고 해야 합니다. 형제는 나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그 형제에게 근심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나에게 기쁨을 줄 형제가 근심에 빠지게 되면 결국 나에게 주어질 기쁨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교회는 근심으로 가득 차는 교회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는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의 기쁨을 돕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 역시 형제의 기쁨을 돕는 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신다는 기쁨이 있을 때 그 기쁨을 가지고 근심에 빠지고 낙심에 빠진 자를 찾아서 그들의 기쁨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이 사랑으로 되어서 그 사랑을 가지고 근심에 빠진 자를 찾아가는 일을 사도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신자의 할 일입니다. 신자가 진짜 기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기쁨을 형제에게 나누어 줄 때입니다. 내 기쁨이 형제에게 나누어질 때 나의 기쁨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은 형제에게 하나님의 기쁨을 나눠주며 살아갑니까 아니면 근심거리가 되면서 살아갑니까. 형제의 근심까지도 기쁨으로 회복시켜주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신자 되어서 은석교회가 하나님의 기쁨으로 더욱 커지는 교회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