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한 성령 (고후 12: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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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행적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니까 사도니까'라는 생각을 갖기가 쉽습니다. 즉 예수님이니까 그렇게 할 수가 있었고 사도니까 그렇게 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핍박을 받고 사도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핍박을 받고 죽어 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다만 옛시대에 있었던 신앙을 지키다 죽어간 위대한 영웅정도로 취급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기리고 떠받들기는 하겠지만 그 삶을 우리에게 요구하지는 말라는 심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삶의 행적들이 지금의 우리들의 삶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지키고자 하는 방어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사도를 위대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의 삶이 내 삶이 되기를 소원하며 하나님께 나오지는 않습니다. 비록 성경에 등장하는 사도들이 신앙적으로 위대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세상 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미련했고 정신나간 것이고 도저히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신앙은 그들처럼 되고 싶지만 삶은 그들처럼 되고 싶지 않는 것이 지금 대다수 신자들의 심정입니다.

사실 우린 너무 염치없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세상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지만 종으로서 혜택이란 핍박과 배척 속에 죽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 역시 부름 받은 제자로 살았지만 그들의 인생은 세상적으로 볼 때 볼품없고 실패한 인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온 일생을 복음을 위해서 바친 그들도 하나님께 세상적인 혜택을 입어본 적 없었고 오히려 죽음을 당했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봉사 헌신이란 단어를 쉽게 남발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봉사했으니까 헌신했으니까 하나님이 복주시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염치없는 짓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의 일생과 내 일생을 달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일생과 내 일생을 달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즉 우리의 일생은 주님의 일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본문 18절에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고 말합니다. '동일한 성령' '동일한 보조'라고 합니다. 예수님께 함께 한 성령이나 사도 바울에게 함께한 성령이나 디도에게 함께 한 성령이나 다같은 한 성령입니다. 각기 다른 성령이 아니다는 것은 각기 다른 행동이 나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한 성령이기 때문에 한 성령 아래서는 동일한 보조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진짜 성령을 받은 자인가를 알려면 예수님과 사도들의 삶에 나를 대비해 보면 됩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성령을 받은 사도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사도에게서는 남을 위해서 자기를 허비하는 모습만 나타납니다. 사도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성령이 사도를 인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남을 위해서 자기를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마음인 성령에 붙들려 사는 자라면 당연히 남을 위해서 자기를 버릴 줄 아는 모습이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니까 그렇게 살 수 있었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성령 달라'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사람들은 성령을 자기의 능력으로 삼아서 이득을 보려고 성령을 구하지만 사실 성령이 임한다면 성령은 우리를 자기의 포기의 길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14, 15절에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사도의 마음은 고린도 교회들로부터 어떤 재물의 이익을 얻을 마음은 전혀 없고 다만 고린도 교인을 얻고자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재물을 저축하는 마음으로 고린도 교인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를 원해서 자기를 허비합니다.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자신까지도 허비하겠다는 것입니다. 허비한다는 것은 어떤 이득도 없는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즉 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어떤 이득도 바라지 않고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함께한 사도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바울은 같은 성령으로 일한 디도를 말하면서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라고 합니다. 즉 고린도 교회에 보낸 디도도 교회로부터 어떤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일하더냐는 것입니다. 동일한 성령을 받았고, 동일한 보조로 일한 디도에게서도 바울과 같은 모습이 보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이를 취학 위해서 일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와 같은 보조로 일하는 것이고 한 성령을 받은 자에게서 보여질 수밖에 없는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에게 보낸 성령을 오늘 우리에게도 보내신다면 결국 사도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 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와 동일한 보조를 취해줄 것을 요구하십니다. 사도가 남을 위해서 자기를 허비하는 인생을 살아갔다면 우리도 사도와 보조를 맞추어서 남을 위해서 자기를 버릴 줄 알고 포기할 줄 아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은석교회에 성령이 함께 하신다면 분명히 이런 모습들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현대교회가 남을 위해서 자기를 허비하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것을 모으고 커지기 위해서 바쁜 삶을 살았다면 그것을 과연 성령이 함께한 모습이겠습니까? 성경 어디에도 성령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목사가 성령을 받아서 능력 있는 설교를 하고 싶어하지만 결국 자기 이득을 위한 것이 아닙니까? 성령을 받아서 병을 고쳐보고 싶어하지만 그것도 역시 자기 이득을 위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성령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혹 성령을 받아서 뛰어난 신자가 되보고 싶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신비한 이적을 행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면 즉시 버리십시오. 성령이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 마음에는 사도와 동일한 보조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으로 성령을 구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께 날마다 성령을 보내서 예수님이 가신 길로 인도할 것이고 사도들과 동일한 보조로 살아가도록 하실 것입니다. 과연 성령이 함께 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성령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합니다. 사단의 방해을 이기시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알게 하십니다.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 앞에서 자신의 못남을 고백하며 나를 주님이 가신 길로 인도해 달라는 소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을 받은 사도의 모습이었으며 사도와 동일한 보조로 행했던 디도의 모습이었으며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로 모으십니다. 하나로 단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모으십니다. 성도가 하나된다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뜻을 모아 힘있게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한 성령 아래서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과 동일한 보조로 일하며 남을 위해 자기를 허비할 줄 아는 인생으로 마음을 모으는 것입니다.

동일한 성령으로 사도와 동일한 보조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가 한 것은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 앞에서 자신의 행동은 먼지와 같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감히 자신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한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필히 동일한 마음으로 드러내고 동일한 보조로 살아가게 됩니다. 나 자신이 주님의 사랑에 보조를 맞추고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에 보조를 맞추어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시고 성령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사랑을 받은 흔적이 보여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