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 기 (고후 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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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상대방을 구원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당신은 망하는 자냐 아니면 구원 얻을 자냐'를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못할 때 신자나 교회는 전혀 다른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로 오해해 버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15절에 보면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고 합니다. 이 말을 오해하면 신자는 신자나 불신자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야 한다라고 말해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신자는 불신자들이 들어서 불쾌해하고 거부할만한 말은 삼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호감을 가질 수 있도록 그들 앞에서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향기를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고 좋아할 착한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15절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신경쓸 것 없이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느냐에만 관심을 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 얻을 자와 망하는 자를 구분하는 일을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매몰차고 독선적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씀한 이상 신자된 우리들은 이 향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을 때 싫어하는 자가 있고 믿는 자가 있습니다. 싫어하는 자는 망하는 자입니다. 망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냄새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솔직한 인간적인 마음으로라면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은 삼가하고 싶을 것입니다. 더구나 상대방이 친한 사람이거나 친척이거나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면 더욱 더 듣기 거북한 말은 삼가고 감추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17절에 사도 바울은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조그만 융통성도 주지 않습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상대방의 기분을 거스리는 말을 해서 교회를 나가게 하는 것보다는 우선은 교회에 눌러있도록 해서 천천히 복음을 알도록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도 사도 바울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사람이 그 말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는 염두에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받은 것을 그대로 전하기만 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말입니다. 그래서 16절에 '누가 이것을 감당하랴'라고 말씀함으로서 이렇게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군가가 자기를 배척하고 싫어하는 것을 괴로워합니다. 항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그대로 전할 때 어떤 반응이 올 것인가를 잘 알고 있는데 쉽게 그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감당하기 어렵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감당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때 그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기준에 자기를 맞추는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사람들은 듣기 싫어하고 거부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나도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내가 기뻐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에 나도 싫어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동조하고자 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은 보지 못하고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지 안되는지만 보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순전하게 받은 그대로 전할 때 교인들에게서는 싫어하고 거부하는 모습이 보여질 것입니다. 그때 목사가 자기의 기쁨을 생각할 때는 말씀이 혼잡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있는 목사를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고 계시는데 사람들이 욕하고 거부하는 것이 뭐 그리 대수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기쁨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려고 한다면 순전한 말씀은 혼잡하게 될 수밖에 없고, 그 말씀 앞에서는 망하는 자와 생명을 얻을 자가 구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망하는 자도 생명을 얻을 자처럼 위장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일이나 그 일을 통해서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순전하게 전하고 모든 일을 하고 있다면 그 일의 결과가 자신에게 어떻게 돌아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니까 나도 기뻐하면 되는데 욕이 돌아오고 오해가 돌아올 때 괴로워하고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결국 그 생각이 다른데 있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당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이 관심두지 않는 것에 너무 많은 관심을 두고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같이 기뻐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슬퍼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혼자 슬퍼하고 낙심하면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일로 인해서 슬퍼하거나 괴로워할 때 그것이 누구의 일인가를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모두가 내일입니다. 하나님의 일 때문에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신자가 자신의 죄 때문에 슬퍼하고 애통해하고 가슴을 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이 될 일입니다. 천국에서 잔치를 벌리고 기뻐하실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일에는 인색하고 자신의 일 때문에 슬퍼하고 염려만 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오직 아버지의 기쁨을 위해서였습니다. 주님 자신은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고 피흘려 죽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기쁨이라면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향기로 사는 것은 세상에서 아름다운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신자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어떤 일이 아닙니다. 교회나오고 기도하고 구제하는 행위를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해서 살려고 했을 때 저주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자 할 때입니다.

어려움과 고통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신자가 안다면 비록 고통이고 어려움속이라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바윗돌처럼 꿋꿋하게 서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쁨보다는 자신의 기쁨이 우선되었을 때 그 사람은 이것을 절대로 감당하지 못합니다. 내게 기쁨이 되는 일이 있을 때만 웃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신자의 흉내를 내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일에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여러분이 오히려 복음을 싫어하는 자리에 있지 않은지 자신을 살피면서 하나님의 기쁨에 같이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그것으로 만족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어야지 내 기쁨을 따로 만들려고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갈 수 없고, 항상 사람에게 매여서 사람의 반응에만 관심을 두며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