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고후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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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향기란 사람들에게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향기로운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즉 신자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살아갈 때 누군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신자가 있을 때 함께 그 향기로 인해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곧 생명에 이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모른 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는 거북한 냄새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향기는 사망에 이를 자와 생명에 이를 자를 구별하는 냄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가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삽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다보면 웃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가는 사람은 울어야 할 일속에서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럴 때 쓸데없는 것으로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웃어야 할 일속에서 하나님께 물을 때 웃어야 할 일속에서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이고 오늘날 우리들에게서 흘러나와야 할 향기인 것입니다.

2:16절에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두 가지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망으로 좇아 사망으로 이릅니다. 이 말의 뜻은 지금도 사망에 처한 사람으로 살아가다가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른다는 것은 지금 생명을 가진 자로 살아가다가 영원한 생명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우린 모두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사망에 있던 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생명을 가진 자로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생명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가치 판단은 속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됩니다. 하나님께 생명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도 덩달아 하나님께 귀한 자로 취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유능한 자로 인정을 받고 칭찬을 듣는 자라 할지라도 생명이 없는 인간은 심판의 대상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못나고 천대받는 자라 할지라도 그 속에 생명이 있을 때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천사보다 귀한 존재로 여김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인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자라면 세상것 때문에 마음 상하거나 기죽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생명과 사망의 차원에서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명과 사망을 구분해야 할 교회가 자본주의 사회의 의식이 팽배함으로 인해서 자본주의 체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생명을 가치 있게 여기고,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기 위해서 힘쓰는 교회가 아니라 수와 양을 가치 있게 여기고 돈에서 돈으로 이르기 위해서 힘쓰는 타락의 모습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대우받아야 할 교회에서 돈이 대우받고, 생명을 가지고 있으면 못할 것이 없는 것이 교회인데 돈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는 교회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선교도 구제도 돈 없으면 못한다는 자본주의 방식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명이 있으면 그것으로 감사하고 힘이 넘쳐야 할 교회가 돈이 없음으로 힘을 잃고 낙심한다면 생명이 돈에 밀리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은 생명이고 돈은 돈이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돈이 없어 은석교회라는 모임이 해체된다고 해서 생명을 품고 살아가는 교회가 해체된 것이 아닙니다. 생명보다 인간의 모임을 중시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오직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으로 천국에 가는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돈을 중시해도 나는 생명을 버린 것이 아니다는 핑계는 대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분명히 재물과 하나님을 겸해서 섬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생명과 은석교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할 때 은석교회를 버리고 생명을 선택해야 할 우리들입니다. 은석교회가 생명을 좇아 생명에 이르는 교회라면 비록 돈이 없고 빈약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나약해지지 않고 주님 계심에 감사하고 생명이 있음에 힘을 얻고 웃으며 모이고 흩어지는 교회의 모습을 보일 것이며, 오직 생명에 이르는 말만 터져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교회, 그 교회가 성령이 함께 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몇몇 사람들로부터 사도직에 대한 의심을 받았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1절에서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내가 사도라는 증거는 내가 몇마디 말을 해서 너희가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사도인 증거는 바로 너희들 자신이라는 것을 2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자신의 사도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은 잘못되어 있는 고린도 교회가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고 회개하고 잘못을 돌이키는 것이 내가 사도라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사도의 편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의 변화는 바울의 능력이 아닙니다. 3절에 보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하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속에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사도 바울의 편지를 통해서 스스로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계시만을 옹호합니다. 결국 고린도 교회가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고 성령을 통해서 회개하고 달라졌다는 것은 바울의 편지가 하나님의 참된 계시였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가 바울이 사도임을 증거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회개와 변화는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고 성령이 일하심을 보여주는 편지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오늘날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보여줘야 할 사람은 바로 생명을 좇아 생명에 이르는 신자들이고, 우리의 회개와 변화를 통해서 보여줘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영이 임했다는 것은 영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을 뜻합니다. 즉 거듭났다는 뜻입니다. 육으로 태어난 인간 새롭게 영으로 태어난 인간이 됨으로 인해서 육의 마음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자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자, 그 자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신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영으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은 생명을 가진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생명을 가진 자답게 생명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마음을 앞세우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아버지를 의지하고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만이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편지의 모습입니다.

돈을 많이 가진 부모를 둔 자식은 돈에 대해서는 걱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돈을 가진 부모가 자식을 도와주지 않고 고생을 시킨다면 그것은 자식을 가르치고 교육을 시키기 위한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이러한 부모의 마음을 아는 자식이라면 비록 고생을 해도 부모를 원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의 아버지는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우리를 얼마든지 갑부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고생하게 하시고 힘들게 하신다면 그것은 우리를 가르치기 위한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아는 신자라면 원망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영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가 여러분의 마음에 살아 계셔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영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편지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