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광 (고후 3: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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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성경 안에서 진실된 것을 그대로 말을 할 때 표정이 변하면서 대화하기를 거부해 버립니다. 반대로 성경에서 말하는 진실된 것은 삭제한 채 말을 하면 은혜가 된다고 하면서 얼굴이 밝아집니다. 도대체 왜 이런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타락한 인간에게는 진실을 듣고 분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자가 따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선택된 자입니다. 그러나 선택된 자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이 함께 할 때 진실된 말씀을 진실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영이 함께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이 실려 있는 성경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만큼 복된 것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그 자체가 곧 생명을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내 속에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큼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에 나가서 이 귀한 생명을 내보이고 자랑해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무시해 버립니다. 이유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같이 경제가 어려울 때 인간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은 신에게 기도하면 우리 경제를 살려준다는 약속이지 경제야 망하든 흥하든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큰복으로 여기고 감사하라고 할 때 누가 그 말에 동의를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인간의 즐거움을 찾아다닙니다. 자기를 즐겁게 해줄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즐거움이 없는 곳에는 나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교회도 자기가 찾는 즐거움이 없을 때 흥미를 잃어버립니다. 부모 때문에, 남편 때문에, 이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가주기는 해도 이미 모든 흥미를 잃어버린 교회이기 때문에 자신의 교회 출석을 감시하는 상대방에게 '나 교회 나왔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작업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이 종교에 흥미를 갖게 되는 것은 종교 안에서 뭔가 즐거움을 찾을 때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즐거움이 종교 안에 담겨 있을 때 그 종교에 대해서 열심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이 이러한 인간의 즐거움을 사정없이 부숴 버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진리란 자기 자신과의 단절 속에서 그 본래의 모습이 보여지게 됩니다. 자기가 자기와의 관계에서 끊어지고 하나님이라는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될 때 비로소 진리의 모습이 제대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옛사람인 자기로서의 즐거움이 없습니다. 단지 새사람된 자기로서 새로운 즐거움이 자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옛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즐거움이 진리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즐거움을 아는 것이 곧 구원 얻은 것이며 그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세상의 즐거움에서 눈을 돌리지 못한 채 스스로 진리를 배우겠다고 나서고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한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죽는 그 순간까지 진리를 모르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채 죽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또 다시 성경을 펴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합니다. 진리를 배우겠다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먼저 묻습니다. 과연 옛사람이 원하는 세상의 즐거움에서 눈을 돌리면서 나오셨습니까? 세상의 즐거움을 일부러 거부하고 즐겁지 않은척하고 살아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즐거움은 비교도 안될 엄청난 즐거움이 진리의 세계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즐거움을 찾고 배우기 위해서 나오셨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얼마든지 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보다 더 차원 높고 귀한 즐거움이 진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신자가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 말씀합니다.

6절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어떻게 일하셨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의문은 죽이고 영은 살린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먼저 우리를 죽이셨다는 것입니다. 죽지 않으면 사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죽이시는 방법이 의문, 즉 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법을 주셨는데 그 이유가 법을 지키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법 앞에서 자신이 죽어야 할 죄인임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그 어떤 가능성과도 단절해라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소위 긍정적인 사고 방식과 단절하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무능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도덕과 양심을 가지면 얼마든지 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들로부터 단절되어라는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죽음입니다. 그 역할을 법이 합니다. 법이 우리를 죽일 때 영이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철저하게 죽어져 있을 때 성령이 일하실 수 있습니다. 새사람으로 교체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영으로 새롭게 살아난 사람은 기존에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새로운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있고 그 영이 우리를 감동시킬 때 우리는 얼마든지 말씀을 볼 수 있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을 귀찮아하고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것에 마음두려고 하기보다는 여전히 옛사람의 즐거움에 빠져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적입니다.

7-11절을 보면 영광을 중점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 영광을 둘로 나누어서 언급합니다. 7절에는 의문의 직분의 영광이 나오고, 8절에는 영의 직분의 영광이 나옵니다. 또 9절에는 정죄의 직분의 영광과 의의 직분의 영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율법이 하는 일, 즉 죽이는 일도 영광이 있지만 영이 하는 일, 즉 살리는 일은 더 큰 영광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죽이는 역할을 할뿐이지 살리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은 우리를 살립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를 살리는 영을 보지 못하고 단지 문자만 바라보면서 문자에 봉사하려고 하고 문자에 매여 살려고만 합니다. 더 큰 영광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법을 받아서 내려올 때 얼굴에 광채가 났던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없어질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의 없어져 버릴 영광도 감히 사람들이 바라보지 못했는데 우리를 살리는 영의 영광은 어떠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영광이 더 귀하냐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렸다는 그것보다 더 귀한 영광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영광을 알고 이 영광으로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신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사망에서 살아났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고 세상에서 뭔가 그럴듯하게 행동한 것을 가지고 영광으로 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잘돼야 하나님께 영광이고,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칭찬을 들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결국 영광을 자기 힘으로 만들어서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의문의 영광으로서 사라질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찬란하고 귀한 영광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이 영광의 귀함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계속해서 세상의 것으로 영광을 삼고 자기의 행동을 영광으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영으로 살아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산자가 되었다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십시오. 산자가 되었다는 것 외에 모든 것은 그 어떤 영광된 것도 다 사라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라질 영광을 위해서 힘빼지 말고 영원한 영광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며 사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이 삶은 자기 단절로부터 시작합니다. 옛사람의 즐거움에서 벗어나 새사람이 누리는 즐거움으로 세상을 살아가시고 하나님이 주신 귀하고 영광된 생명만을 기뻐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