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건 (고후 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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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타락한 후 하나님은 그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지금까지 일해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행동이었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여러 가지의 사건과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들을 있어야 할 곳에 있게 하셨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도록 적당한 사건들이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이 없었던들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의 모든 일에 우연이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이 움직이고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나면서 세상은 진행되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지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고 삽니다.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고 일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 신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주어지는 상황과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배워가는데 마음을 두기보다는 편안한 환경 속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구원의 도구로 쓰여지고 있는 환경과 사건들을 바로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세상을 보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조롱하고, 내 몸 가지고 내 맘대로 사는데 누가 간섭하느냐고 큰소리치면서 살아가지만 사실은 그러한 행동 하나하나가 누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가를 가려내기 위한 하나님의 일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무시하는데도 아무런 재앙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조롱하고 무시하며 살도록 가만히 두시는 것이 하나님의 징계이고 이미 재앙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악한 자를 더 악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저러한 모습이 멸망에 처할 모습임을 깨닫게 하셔서 자신에게 혹 저러한 모습이 없는가를 살피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이것이 악한 자를 살려두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알 때 신자는 쓸데없는 것에 마음두지 않고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배워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악의 세상에서 건지시는 것이 목적이지 세상에서 부요함을 누리고 사는 것에는 전혀 마음을 두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세상 것이 우리의 구원에 방해가 될 때 그것을 뺏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나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신 일인데도 불구하고 눈물을 흘려버리고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항상 자신이 영으로 새롭게 살아난 존재되는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관심은 육이 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이 사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사라져 버릴 세상 영광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영광을 귀히 여기며 살 수 있습니다. 세상 영광이 없어도 하나님의 영이 나를 살린다는 것에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와 같이 우리를 살리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주목적이지 세상의 일로 만족하거나, 세상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그 한 예로서 사도 바울은 모세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아 가지고 올 때 그 얼굴에서 나는 광채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히 모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얼굴의 광채를 수건으로 가림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대화를 하였는데, 그 영광조차도 그리스도를 통한 영광 때문에 빛을 잃고 사라져야 할 광채였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의 영이 가져오는 영광은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영광이 주어진 자로서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세상의 영광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세상에서 비천하게 되든 부하게 되든 그것에는 상관하지 않고 살아갈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세상에서 높아지고자 하고 칭찬 듣고 싶어하는 이유는 모두다 세상의 영광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세상의 영광에는 전혀 마음두지 않고 오직 우리를 살리는 영이 가져다주는 영광에만 모든 마음을 두고 있다면 세상에서 낮은 자리에 처하든 욕을 먹든 조롱을 받든 전혀 마음두지 않은채 주님으로 기뻐하며 살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받거나 욕을 먹거나 미움을 받을 때 분노를 발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 영광으로 마음이 채워지지 못하고 세상의 영광에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라고 합니다. 어떤 소망이 바울을 담대하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세상의 영광은 사라지는 것이요 영으로 주어지는 영광이 영원하다는 소망입니다. 이 소망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부터 받는 오해나 공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리스도로 만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자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말은 하면서도 여전히 그 눈은 세상의 영광을 향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수건이 벗어지지 않고 있는 모습입니다.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쓴 것은 장차 없어질 영광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기 얼굴에 영광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안에서 영원한 영광을 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영광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는 말씀의 영광에 취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14절을 보면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세상의 영광으로 가득한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수건이 벗어지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모세 얼굴의 영광을 진짜 영광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 수건은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 없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영광에 눈이 뜨일 때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눈에 보이는 영광은 영광으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라질 영광 때문에 주님의 영광이 담겨 있는 말씀에 다가가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을 보면 쓸데없는 영광에 치우쳐서 말씀에 다가가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들이 강조하고 요구하는 사라질 영광에 눈부셔하고 마음 뺏김으로 인해서 말씀 안에서 주어지는 참된 주님의 영광은 얼마나 멀리하며 살아왔습니까? 수건은 그리스도안에서 없어집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영광이 어떤 것인가를 깨달았을 때 수건은 사라지게 됩니다.
16절에서도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말씀을 들고 온 모세의 영광도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죄인입니다. 그런데 말씀 자체이신 하나님을 인간이 대할 수는 없습니다. 방법은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포기하시고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를 만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의 영광은 광채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영광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때문에 주님의 영광을 알고 그 영광을 귀하게 여긴다면 그 사람은 얼마든지 자기의 영광은 포기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17절의 자유는 바로 그러한 자유를 말합니다. 주님의 영광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자기 영광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즉 자기 영광, 세상 영광에 매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8절에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본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앞에 주님이 계신다고 생각하십시오. 주님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자기 영광을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형상으로 화하는 것, 그리고 광채는 나지 않지만 우리를 살리는 주님의 영광에 이르는 것, 이것이 신자된 우리들이 바라고 소망해야 할 영광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주님만 소망하면서 얼마든지 낮아질 수 있는 자유함속에서 살아가게 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