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미한 마음 (고후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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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세상에는 사라질 영광과 영원한 영광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에게 사라질 영광에 마음두지 마시고 영원한 영광에 모든 소망을 두고 살 것을 말씀 드렸지만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눈에 세상의 영광이 보이지 않으면 쉬운데, 사실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영원한 영광이 아니라 사라져 버릴 세상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영광이 더 좋아 보이고, 나도 저런 영광을 한번 누려봤으면 하는 생각들이 우리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우린 말씀을 듣고 살아가지만 항상 마음은 번잡하고 혼란한 가운데 있다고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말하고 진리를 말하지만 진리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영광을 포기하지 못해서 진리 아닌 것에 고개를 숙이고 타협을 하게 되고, 그리스도보다는 세상의 힘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육신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육신과 영혼을 죽이는 분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은 이미 마음에서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떠합니까? 마지막을 마음에 두면서 사라질 영광보다는 영원한 영광에 소망을 두고 있습니까? 아마도 그렇게 살려고 하지만 마음대로 안된다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어 왔고, 믿음을 제대로 안다고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잡다한 고민과 생각들이 떠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 고민도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러한 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절에 보면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먼저 직분을 받았다는 것은 사도라는 직분을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는 말입니다. 자신은 영원한 주의 영광을 전하고 가르쳐야 할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은 결국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이 자기의 할 일을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할 일을 정하셔서 자기에게 맡겼다는 것을 말합니다.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낙심은 자기 일이 실패했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사도라고 하는 자기의 일을 자기 일로 보지 않습니다. 만약 자기 일로 본다면 남들이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사도직을 의심할 때 낙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도를 자기 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일로 봅니다. 그리고 자신은 단지 맡은 자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성공 실패는 하나님의 소관이고, 또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결코 실패할 수 없는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즉 눈에 드러나는 현상에 의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바울의 자유함이었습니다.

마지막을 아는 바울로서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흔들림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마지막을 알기 때문에 지금 오해받고 공격받고 고난 당하는 것이 실패가 아님을 안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과 우리들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을 말하면서 마지막을 보고 살지는 못합니다. 항상 눈앞의 결과에 매달려 살아갑니다. 따라서 눈앞의 결과가 좋아 보일 때 마음 흐뭇해하고 뭔가 차질이 있어 보일 때는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의 사라질 영광에 마음두지 않고 산다고 하면서 결국 세상 것 때문에 낙심하고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실패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영광에 비하면 초라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에 흔들림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마지막의 영원한 영광이 마음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만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마지막때 우리를 살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만 그대로 전할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망할 사람은 망하도록 그대로 두시고 살릴 사람만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에 바울은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망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3절에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복음은 망하는 자들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망하는 자들에게는 철저하게 가려져 있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을 전했을 때 어떤 사람은 그것을 거부하고 듣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망하는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편지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는 것으로 보아서 교회 안에서 복음에 가려져 있는 망하는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 자신도 복음에 가려진 채로 있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왜 거부할까요? 복음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주어진 기쁜 소식인데 왜 그 기쁜 소식에 귀를 막고 듣지를 않으려고 할까요? 그 이유는 4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마음이 혼미해져 있기 때문에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누가 마음을 혼미하게 합니까? 세상 신입니다. 즉 사단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사단이 마음을 혼미하게 만들어서 복음이 비취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이 혼미하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영광에 더 마음을 두게 함으로서 영원한 영광을 전하는 참된 복음에 대해서 눈을 뜨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혼미합니까 아니면 복음으로 환한 상태입니까. 어떤 사람은 복음에 대해서 들으면 '그 말이 맞는 것 같다'하면서 예전의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서 분리되기가 싫은 것입니다. 가령 목사가 '기도는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내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임을 알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라고 할 때 '그래 맞다'하면서도 집에 돌아가서 어떤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예전에 누군가가 기도해서 문제가 해결됐다는 얘기를 떠올리면서 '나도 기도해서 이 문제를 해결 받아 봐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 신에 의해서 마음이 혼미해지는 것입니다. 세상 신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동원시켜서 신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함으로 복음에 가려진 자가 되게 하려고 하는데 정작 신자들은 사단에게 속아 넘어 가는 것입니다.

신자는 복음에 굳게 서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복음에 굳게 서 있지 못하고 옆사람들의 신앙체험이나 신비한 현상들을 목격하면서 거기에 관심을 두다 보니까 자신의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고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면서 마음이 혼미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혼미하다는 것은, 어두움의 상태 그대로라는 뜻입니다. 복음은 영광의 광채라고 말합니다. 어두움을 물리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안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마음속은 여전히 악한 생각과 더러움과 시기와 탐욕으로 가득차 있다면 그것은 어두움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영원한 영광에 이를 존재입니다. 천사와 같은 존재입니다.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라에서 영원히 살 존재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세상의 사라질 영광 때문에 마음이 혼미해져서 낙심하고 번민하며 살아가는 것입니까? 세상과 여러분을 비교하지 마십시오. 세상과 자신을 비교하도록 하는 것은 세상의 신이 우리의 마음을 혼미케 하기 위한 사단의 마음입니다. 세상과 자신을 비교할 때 남는 것은 시기와 한숨과 불평과 탐욕밖에 없습니다. 그런 혼미한 마음으로 있는 사람에게 아무리 복음을 전할들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이미 마음속은 '어떻게 하면 잘살아볼까?'라는 어둠의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데 영광의 광채인 빛에 마음을 둘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두운 마음이 예수님의 복음의 광채로 인해서 밝아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사도를 세우시고 목사를 세우신 목적입니다. 복음은 여러분의 혼미한 마음과 어두운 마음을 빛으로 다스립니다. 이 다스림에 순종하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눈을 들어 세상을 보지 마시고 하늘을 보시고 마지막을 마음에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