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 배 (고후 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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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많이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능력 받자'는 것입니다. 능력 받아서 전도하고 능력 받아서 봉사하고 능력 받아서 기도하자는 말을 심심찮게 하고 있습니다. 능력이 없으면 전도를 해도 소용이 없고, 능력이 없으면 봉사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보면 모두 양적인 결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전도하는 것이 능력이고, 기도해서 원하는 대로 응답 받는 것이 능력이고, 많은 봉사를 하는 것을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가운데 능력 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능력을 달라고 기도한다면 결국 능력이 없다는 뜻인데, 능력이 없는 자가 하는 기도가 응답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될 때 결국 능력이 있어야 응답 받는 기도와 능력이 없어도 응답 받는 기도로 구분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능력을 전혀 다른 의미로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능력을 말합니다. 능력이란 힘입니다. 그러나 그 힘이란 물리적인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 처한다고 해도 그 환경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100명된 교회를 1,000명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닙니다. 100명된 교회를 1000명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기술과 재주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100억짜리 예배당을 건축하는 것도 돈 많은 재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만약 교회가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100억짜리 예배당을 짓는다'고 자랑할 때 그 자랑은 재벌들 앞에서는 오히려 하나님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의 그 무엇을 가지고도 할 수 없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죽은 자를 영원히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능력으로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능력까지 함께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무시하고 가볍게 취급해 버립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에 대해서 마음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7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능력이란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내가 능력을 받아서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질그릇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 질그릇이 뭔가를 했다면 속에 보배가 있기 때문이지 결코 질그릇이 능력을 받아서 하는 일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릇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릇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 보배가 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포함하고 있는 귀한 그릇으로 간주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질그릇에 불과한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보배가 내 안에 있으면 그릇인 내가 달라질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가 잘못된 성화론을 이끌어 낸 것입니다. 예수가 내 안에 계시면 나는 점차 달라진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배가 질그릇에 들어 있다고 해서 그릇 자체가 변하지 않습니다. 보배는 그릇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단지 보배를 담아서 그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하라고 있는 것이 그릇입니다. 때문에 질그릇에 불과한 우리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내 안에 계시는 보배이신 주님이시지 결코 그릇인 내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뭔가 달라진 인간이 되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보배를 이용해서 자신의 종교적인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죄인은 어디까지나 죄인 자체로 존재합니다. 죄인이 복음을 알았다고 해서 죄인의 모습을 벗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속에 보배가 있느냐 없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보배가 있기 때문에 내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내 속에 보배 때문에 감사하면 되는 것이지 자꾸 질그릇에 불과한 자신의 겉모습을 바라보면서 낙심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질그릇에 불과한 것에 보배를 두신 것은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의 광채를 비추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지 우리의 능력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 질그릇에 불과한 우리에게 보배를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자신을 질그릇이 아니라 금칠을 한 귀한 그릇으로 알고 있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으로 한 것으로 오해해 버릴 것입니다.

내 안의 보배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내가 어떤 그릇으로 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많든 배우지 못했든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네 속에 뭐가 들어있느냐를 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떨 때 우리 안의 보배를 나타낼 수 있습니까? 그것은 8,9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자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능력이라는 것은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환경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능력이란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가운데 발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봐도 실패한 자리이고 마땅히 낙심하고 눈물 흘려야 할 자리에서 낙심하지 않고 승리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이 이러한 능력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날마다 좋은 환경이 주어지기만 목매어 기다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전혀 관심 두지 않고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겉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속에 진짜 보배가 자리하고 있는지를 보시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능력이 없으면 낙심할 수밖에 없고 보배를 알지 못하면 원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배가 되셔서 하나님의 아들된 자의 마음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죽은 자를 살리신 능력으로 계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능력으로 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겨쌈을 당하고 핍박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10,11절을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같은 고난의 과정이 계속 반복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반복되어져야 할 이유는 고난과 죽음 속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고난을 회피하고 죽음을 두려워 할 때 예수님의 생명은 나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인생은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진 인생이었습니다. 자신을 치장하거나 자신을 위한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짐으로 그 죽음이 자신에게 흡수되고 침투되어서 자기 속에 확산되기를 원하는 인생이었습니다. 바울이 어떤 환난도 이겨낸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인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보배를 품고 살아가는 질그릇의 인생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의 문제점은 보배를 통해서 자신이 귀하게 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자신을 치장해주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보배로만 생각하고 죽음을 짊어진 그릇되게 하는 보배로는 생각치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보배는 돌멩이로 취급해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이 보배이신 주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살고자하는 것은 보배를 남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였습니다. 12절에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즉 내가 고난을 받으므로 너희에게 주님의 생명이 보여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속에 보배를 두고 살아가는 사도의 마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속에 보배를 두고 사신다면 하나님은 그 보배를 확인하시기 위해서 여러분을 낙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환경에서 어떻게 하시는가를 보실 것입니다. 질그릇에 마음을 두지 마시고 여러분 속의 보배에 마음두시면서 그 보배를 나타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