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요한이서 1:1-3 장로의 관심

<본문>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요한이서 1:1-3)

<설교>

요한이서 역시 요한일서와 맥을 같이 하며 진리와 사랑을 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진리와 사랑은 교회가 교회로 굳게 설 수 있는 확고한 기초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진리와 사랑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으며 어떤 교회도 진리와 사랑에 대한 관심이 없이 참된 교회의 길에 설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진리에 사랑을 말하고 있는 요한이서는 현대 교회를 강하게 질책하는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진리와 사랑보다 다른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과연 진리와 사랑이 있는 교회의 모습인가를 생각해 보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과연 어느 교회가 ‘우린 진리와 사랑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말하겠습니까? 모든 교회가 하나 같이 진리와 사랑에 관심을 두고 있노라 외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것은 ‘진리와 사랑에 관심을 둔 교회라면?’입니다.

1절을 보면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로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에 대한 이해가 분분하지만, 요한이서의 내용이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일서와 내용상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을 본다면, 당시 노인이었던 사도가 자신을 지칭하는 또 다른 표현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장로가 편지하는 대상인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자녀라는 것도, 자녀를 둔 어떤 부인을 지칭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자녀라 불리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장로는 교회를 향해 편지를 하면서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만이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2절의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로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진리’가 사랑의 이유인 것입니다. 참으로 간결하지 않습니까?

사실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매우 복잡합니다. 여러 세상의 조건들과 연이 얽혀서 맺어지는 것이 인간관계입니다. 사람을 사귈 때도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중에 가장 중심된 것이 ‘사귀어 놓으면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인가?’일 것입니다. 사귀어 봐야 도움을 줄만한 위치의 사람이 아닐 때 손을 내밀지 않는 것이 세상일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인간관계는 항상 끼리끼리 어울리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끼리 자연히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의 관계는 간결합니다. 돈이나 권력이 끼어든 관계가 아니라 오직 진리가 개입되어 있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하든 부자든, 힘이 있는 자든 힘이 없는 자든 함께 어울리고 기뻐하며 사랑하게 하는 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진리가 좋고 진리에만 관심을 두고 진리만이 귀하기 때문에 진리를 아는 자를 만나면 자연 남이 아니라 형제의 관계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께 생소한 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교회는 진리 하나 때문에 사랑의 관계가 만들어 진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그 사람 앞에서 비굴해져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타인이 갖고 있는 것으로 인해 시기가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서는 안되며,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을 자랑할 수 없고, 나보다 못가진 자에 대해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진리의 현장인 교회입니다. 그 모든 것은 진리가 내포하고 있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다만 진리 안에서 진리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로 만나고 교통하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사랑은 의도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진리를 향한 깊은 관심과 진리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믿음에 있다면 진리 안에 있는 형제에 대한 사랑은 자연스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항상 문제는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진리에 관심이 없으면서 형제를 사랑하겠다고 하는 것도 문제이며 진리에 관심이 없는 채 형제의 사랑을 기대하는 것도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진리와 상관이 없는 사랑에 관심을 둘 것이고 그것은 진리를 알지 못한 세상의 인관관계, 사랑의 수준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진리와 사랑에 관심을 둔 장로가 교회에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3절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은혜와 긍휼과 평강인 것입니다. 진리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교회로부터 기대하는 것입니다. 장로가 교회에 기대하는 것은 교회의 부흥도 발전도 아닙니다. 오직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장로의 편에 서서 교회를 바라본다면 교회에 있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분명히 내려질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교회가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표면적인 바램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정작 원하는 것은 교회의 성장인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원한다고 해도 그 최종적 결과는 성장을 향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즉 교회에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다면 사람들이 그 교회로 모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장로가 이런 마음으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말했을까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교회에 성장을 가져다주기 위해 주어지는 것일까요?

장로는 택함 받은 신자에게 참으로 귀한 것은 죄인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여 주신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와 사랑 가운데 있던 장로의 관심이며 바램입니다. 또한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의 증표를 무엇에서 찾습니다. 나에게 잘해줄 때 그것을 사랑으로 여기십니까? 사실 사람과 사람의 친분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내 기분 따라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는 것이 친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제삼자로부터 ‘그가 너를 욕하더라’는 말 한마디만 들으면 분노와 의심으로 뒤바뀌는 것이 인간관계이지 않습니까? 누군가에게 잘해준다고 해도 그것 역시 그가 지금 나의 마음에 들기 때문이지 기분이 조금만 달라져도 태도 또한 달라지는 것이 인간이지 않습니까? 이처럼 간사스런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을 어찌 사랑이라 할 수 있으며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 의해 변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태도와 불순종을 보인다고 해도 끝까지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택한 자기 백성을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이러한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의해 살아가기를 소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 거한다면 그는 형제에게서 인간적인 조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보게 될 것이고, 그것이 곧 사랑인 것입니다.

따라서 장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교회가 진리와 사랑에 거하지 않을 때일 것입니다. 다른 것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진리와 사랑에서 마음이 멀어지는 것이야 말로 장로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교회에 그런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7절을 보면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나왔다고 말하는데, 이것을 보면 당시 교회에 미혹하는 자로 인해서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에서 멀어지는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한이서는 이것에 대한 장로의 권면이며 안타까움이고 염려며 사랑인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아는 신자만이 사랑에 거하며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맛을 알게 된 신자가 사랑에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죄로 인해 죽어야 하고 멸망의 자식으로 태어난 우리를 택하셔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다는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것이지 않습니까? 이 은혜에 함께 하고 은혜를 누리는 것이 평강이 아니겠습니까? 진리에 모든 관심을 두기에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은혜와 평강에 있는 신자로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 역시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사도는 참으로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자신에게 가장 귀한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도, 곧 장로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장로의 권면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진리의 가치는 진리를 아는 자에게만 드러납니다. 성경의 말씀 또한 진리를 아는 자에게만 그 귀함과 가치가 극대화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입니다. 장로가 관심을 두고 있던 진리에 우리 모두 깊은 관심을 두고 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으로만 ‘나는 진리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여기지 마시고, ‘성경공부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니까 나는 진리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마시고 진리에 관심을 둠으로써 예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이 내 심령을 채우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진리가 관심인 사람은 다른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은석 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리가 중요할 뿐입니다. 즉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관심거리가 아니라 은석교회에 진리가 넘치고 모든 성도가 진리를 알고 진리를 나누는 자로 모이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에 관심을 둔 마음으로 만난다면 함께 진리를 듣고 진리를 나누는 것이 좋고 기쁠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