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요한이서 1:7-8 미혹하는 자

<본문>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요한이서 1:7-8)

<설교>

진리에 모든 마음이 집중되어 있는 장로에게 기쁨은 신자가 진리에 행하는 것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장로를 대하면서 ‘나는 형제에게서 어떤 기쁨을 얻는가?’라는 물음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갈 6:6절에서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신자의 관계는 좋은 것을 함께 하고 나누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좋은 것이란 세상적인 의미에서 좋은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인한 열매가 아니겠습니까? 즉 말씀에 의해서 내 안에 맺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과 긍휼, 이 모든 것을 함께 하고 나누는 것이 신자의 관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4절에서의 장로의 기쁨도 이러한 신자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리에 모든 마음을 두고 사는 장로로써 복음을 들은 형제가 진리에 거한다는 것 보다 더 한 기쁨이 과연 무엇일까요? 진리가 아닌 예배당이나, 사람에게 관심을 둔 장로라면 진리에 거한다는 것보다는 많은 돈을 헌금하고, 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한다는 말로 기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진리에 거하는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러한 장로라면 신자에 대한 고민과 염려는 열심히 봉사하지 않고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것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관심인 장로는 신자가 진리와 사랑에서 벗어날 때 근심하고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장로는 교회에 진리가 아닌 다른 것으로 신자를 미혹하는 일이 많이 발생했다는 것으로 근심합니다.

미혹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께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내용에 대해 여러분은 가벼운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스스로는 예수님이 육체로 임하심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여러분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만이 아니라 사이비를 제외하고 기독교라면 다들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육체로 임하신 것을 부인하지 않고 그렇게 믿는다는 고백을 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육체로 임하신 것을 믿는 것이 될까요?

사실 우리는 말은 맞게 하지만 내 속에는 전혀 다른 것을 담아 두고 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나에게서 무엇이 나오는가를 보면 됩니다. 은혜를 말한다면 은혜가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예수님의 육체로 오심을 믿는다면 그 믿음에 의해 어떤 열매가 보이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심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악함을 깊이 보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또 한편으로는 자신에게는 의가 될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음을 믿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에는 이 모든 것이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그 믿음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어떤 행동으로 나아가게 할까요? 자기 의가 나오게 하겠습니까? 자랑이 나오게 하겠습니까? 행한 것을 기준 삼아 타인과 자신의 신앙을 비교하겠습니까? 또한 일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신앙을 내 멋대로 폄하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가난하고 없는 자라고 해서 그를 무시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오심을 믿는다는 것은 복에 거할 수 없는 나를 복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복의 근원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어떠한 복으로 인도하실까요? 하늘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세상의 것을 복이라고 하면서 구한다면 그 역시 예수님의 오심을 믿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그의 입술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말미암아 증거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8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가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고 말합니다. 사도의 일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진리를 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라는 것은 사도가 전한 진리와 사랑에 거하고 살아갈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사랑에 거하는 삶이라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것을 바라보면서 실망하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에 담겨 있는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누리게 된 영원한 생명이라는 무한한 복으로 인해 그 마음이 채워진 자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진리 외에 다른 것을 앞세울 수 없습니다. 진리에 다른 것을 더 얹어서 그것이 마치 진리인양 하는 것은 신자를 미혹하게 하는 무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신자의 마음에 다른 것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즉 진리와 사랑과 자비와 은혜만이 넘치도록 돕는 것이 교회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날 현실은 미혹하는 자가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체로 임하지 않으셨다’는 말로 미혹하는 자도 있겠지만, 진심으로 신자의 마음을 미혹하는 것은 자신의 죄가 아닌 의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의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자랑과 비교가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육체로 임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피의 의미를 짓밟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긍정적 사고를 가져라’ ‘하면 된다’ ‘열심히 하면 복 받는다’ ‘살아있는 교회가 부흥한다’ 이런 모든 말이 신자를 미혹하는 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8절에 보면 ‘온전한 상’이라는 말을 합니다. 신자가 진리와 사랑에 거함으로 주어지는 온전한 상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진리와 사랑 안에서 바라고 끝까지 소망해야 하는 것은 영원한 하늘의 생명이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세상의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온전한 상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이야 말로 미혹하는 자들의 유혹일 뿐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어떤 복을 누리게 되었는가를 알게 됨으로써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고, 그 은혜와 사랑이 신자로 하여금 형제를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오직 하늘의 것만을 소망하게 합니다. 그것이 참된 진리입니다. 따라서 보이는 세상에 소망을 두게 하고, 보이는 교회에 관심을 두게 하는 것은 미혹하는 자들의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