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요한이서 1:12-13 성도의 교통

<본문>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하느니라(요한이서 1:12-13)

<설교>

신자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의 내용에 보면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통은 교제 또는 사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의 교제를 신앙으로 고백할 정도라면 이는 성도의 교통, 즉 교제는 교회의 중요성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합니다.

성도의 교통과 세상 사람들이 서로 교통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즉 성도의 교통은 세상의 교통이 보여주는 것처럼 단순히 사람을 만나고 친분을 쌓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통이 세상의 교통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성도의 교통에는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2절에 사도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로다”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도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사도에게 기쁨이 된 그 중심에는 진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중심이요 그리스도의 교제의 본질이 되고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즉 진리가 빠지고, 진리에 관심이 없이 교통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리를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의 교통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를 하나 되게 하고 마음이 서로 교통하게 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신자는 진리 안에서 마음이 교통되고 생각이 교통되어집니다. 이것을 ‘하나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이러한 하나 됨을 방해하는 것은 진리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두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는 미혹하는 자들을 삼갈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두고 진리 아닌 다른 것을 교훈 삼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항상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향하게 합니다. 그리스도께만 소망을 두게 하고 인생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참으로 잘된 것임을 알게 하고 그래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만 모든 관심을 두게 합니다. 그러나 진리 아닌 것은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리스도를 빙자하여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보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적그리스도로부터 자신을 지킴으로 교회의 하나 됨을 잃지 말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교회의 하나 됨의 무너짐은 분란과 다툼이 발생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생각과 관심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 생각과 관심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길에 있을 때 하나 됨은 이미 무너진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교회가 할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마지막 두 구절에서 교회 생활에서 신자가 진리와 사랑으로 어떻게 하면 좀 더 깊이 있게 교통할 수 있고 사귐에 있을 수 있는가를 좀 더 실제적으로 말합니다. 12-13절을 다시 보면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하느니라”는 말로 편지를 끝맺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형제를 향한 사도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글을 써보면 직접 대면하여 대화를 하는 것에 비해 부족한 면이 많음을 느낍니다. 사도 역시 종이와 먹으로 쓰는 것만으로는 형제의 기쁨을 충만케 하는 일에 부족함을 느꼈는지 직접 대면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원하는 것은 형제가 진리로 인한 기쁨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사도에게는 진리 외에 기쁨이 되는 좋은 것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진리에 대해 더욱 많이 자세히 증거함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사도가 누리는 기쁨에 참여하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면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사도의 심정을 드러낸 것입니다.

진리의 기쁨과 즐거움을 맛본 신자라면 형제 대한 사도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능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신자가 진리의 기쁨을 아는 심령으로 서로 만나서 진리를 얘기하는 것이야 말로 서로에게 기쁨을 충만케 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이런 관계로 모이고 있습니까? 이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의 관계는 진리 안에서 바르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자의 교통에서 중요한 것은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히 10:25절을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는 말을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이라는 것은, 신자가 서로 만나는 것을 별 의미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가 그 속에 없기에 모이든 모이지 않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결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라면 비록 모임에 참여하여 몸은 함께 한다 할지라도 신자의 교통은 없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임은 함께하여 먹고 노는 것에서 기쁨을 찾지만 신자의 모임에서의 기쁨은 진리입니다. 진리를 안다면 진리를 아는 형제의 모임을 귀하게 볼 것이고, 모임에서 기쁨이 충만해 지는 것도 진리로 인해서일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모임을 끝없이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항상 진리에 모든 관심을 두고 전함으로써 진리를 바라보고 모이는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설사 그 안에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것으로 신자의 교통이 방해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를 모르는 자가 있다면 진리를 아는 사람으로서 그에게 할 말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자에게 진리를 전하고 나누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넌 진리를 모르니까 너와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식이 되어버린다면 결국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 하나 됨을 무너뜨리는 길로 가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로서 추구해야 할 것은 진리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진리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진리에 다른 무엇인가를 얹는 것입니다. 진리는 진리외에 다른 무엇이 첨가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빙자한 적그리스도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나의 전부라면서 또 무엇을 얹으려고 하십니까? 진리가 전부라면 진리만을 바라보고 소원하는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진리를 말하면서 세상에서의 복을 말하고, 성공을 말하고, 교회 부흥을 말한다면 과연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까?

진리를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된 도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멸망의 자식인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신 은혜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것이야말로 죄인된 자에게는 기쁨의 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는 우리를 충만한 기쁨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쁜 소식을 두고 또 무엇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까? 진리 외에 무엇이 여러분을 충만한 기쁨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신자가 진리의 기쁨을 누린다면 형제가 진리에 거하는 것을 볼 때 그 기쁨을 충만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의 심정이었습니다. 우리가 소원해야 하는 것은 이런 기쁨의 심령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신자로서 감사도 기쁨도 수정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이 빠진 기쁨과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의 만남에는 세상 것에 대한 자랑이 끼어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통은 날마다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이 새롭게 되어 질 때 보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의 은혜로 인한 기쁨과 감사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신자의 교통이 있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