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디모데후서 1:9-12  거룩하신 부르심

 

<본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디모데후서 1:9-12)



<설교>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하나님의 나의 왕으로,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결과입니다.

9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믿음의 목적을 자기 구원에 둡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었으니 하나님은 내 믿음을 보시고 나를 구원하신다’는 계산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착각이라는 것은 9절의 말씀에서 분명히 확인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셨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즉 부르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셔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즉 구원을 부르심의 목적에 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부르심 자체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합니다. 부르심이 곧 구원이기 때문에,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부르심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즉 인간의 행위를 보시고 쓸만한 사람을 골라서 부르신 것이 아니고 이미 영원 전부터 정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우리의 사고방식을 무너뜨리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와 열심과 정성을 보시고 보답하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적어도 9절의 이 말씀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 역시 인간이 은혜를 받을만한 행동을 하거나, 간구한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주시기로 작정한 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어지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는 인간의 열심도 정성도 그 무엇도 개입될 수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자신의 행위를 내세워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고자 하거나 행위를 비교하며 신앙의 높고 낮음을 구분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은혜를 떠나 있는 인간들의 작태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신자를 부르신 것이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면, 왜 성경은 신자의 구원에 대해 언급합니까? 가령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라는 구절을 보면, 분명 하나님은 신자의 구원에 관심을 두고 있고 또 구원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신자의 구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놀라운 은총과 사랑을 입었는가를 구원을 통해서 확인함으로써 세상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복을 증거하며 살게 하기 위함인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신자가 구원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없이 십자가를 증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거룩한 부르심을 입은 신자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신자의 사명은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합된 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의 행위에 의한 것이라면, 결국 증거하고 자랑할 것은 자기 행위일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영원한 때부터 예수 안에서 주시기로 작정한 은혜대로 하신 것이라면, 부르심을 입은 자가 할 일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는 항상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인간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한다면, 단지 예수님의 은혜만을 말하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뭔가를 이루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란 영원한 때 예수 안에서 주시기로 작정하신 은혜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시기로 하신 예수 안의 은혜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주어진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인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엉뚱한 것을 은혜라며 좇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나타난 은혜만을 참된 은혜로 여기고 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 신자의 할 일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 것에서 은혜를 찾고 또한 원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썩어질 것임을 생각한다면 땅의 것을 은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이 썩어질 땅의 것을 위해서겠습니까? 하나님이 영원한 때 예수 안에서 주시기로 작정하신 은혜가 썩어지고 사라질 땅의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세상은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으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영원히 썩지 아니할 기업을 받을 자로 부름 받은 것이야 말로 말할 수 없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은혜를 받은 자이기에 놀라운 은혜를 증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11절에서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는 자신을 복음을 위해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반포자나 사도나 교사라는 것은 모두가 복음을 증거하는 위치에 있음을 말합니다. 즉 사도는 자신의 존재이유를 복음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살아야 할 자로 부름을 입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사람은 날 때부터 죄와 사망의 세력에 붙들린 자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대적할 수 없는 세력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우리의 심판을 대신 담당하시고 피 흘리심으로 모든 죄가 용서받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힘과 권세로도 불가능한 일이 예수님으로 이루어졌음을 생각한다면 세상의 무엇이 귀하다고 해도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 앞에서는 시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았다면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우리의 전부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이 복음을 위해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때문에 복음을 위해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사명인 것입니다.



목사가 되고 교사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과 위치에서도 복음을 위해 존재함을 잊지 말고 복음이 증거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자신의 행실을 자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내 행실을 자랑한다는 것은 곧 예수 안에서 주어진 은혜를 가벼이 하는 것이며, 은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빙자하여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 은혜를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이 시시하게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는 증거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도 부요한 자, 권세 있는 자, 성공한 자를 높이보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아들의 은혜로 감사하면서 사는 신자를 시시하게 보시겠습니까? 결국 문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아는 것이 관건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아는 것이 신자로 하여금 고난을 받되 부끄럽지 않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12절에서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 아니한 것은, 바울이 주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하나님이 마치실 때까지 주님이 능히 지키실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고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아는 것이 능력이고 힘이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