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디모데후서 1:13-14  아름다운 것

 

<본문>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디모데후서 1:13-14)



<설교>

세상은 무엇을 볼 때 아름답다는 느낌을 가질까요? 자연을 바라볼 때 그런 느낌을 가질 수도 있고,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서로 사랑하며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감동하면서 아름답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아름답다고 인정하시느냐에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는 눈과 죄에 속한 자로 전락한 세상이 세상을 보는 눈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같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아름다운 것으로 인정하시고 기뻐하실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이 아름답게 여기는 삶을 사는 것이 곧 말씀대로 사는 것이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이고 신자다운 것이라고 여기지만 세상이 인간의 아름다운 삶으로 변화될 것 같으면 예수님은 세상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한다고 여기는 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신자로 하여금 세상이 아름답다고 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라면,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아야 정상인데, 믿지 아니한 사람들에게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 소위 아름다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을 내세워 믿음의 증거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13,14절)고 말합니다.



본문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말하고 있는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답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는 디모데에게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 받아 지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디모데에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이기에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상태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후 인간은 생각하고 계획하는 바가 항상 악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 영광을 생각하고, 그것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기에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인간에게서 선한 것, 아름다운 것이 나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 눈에 아무리 좋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무리 고상한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낸다고 해도 결국 제 눈에 안경일 뿐이지,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보실 때는 모두 말씀에서 벗어난 악한 자들의 모습에 불과할 뿐입니다.



바벨탑이 선한 것입니까? 악한 것입니까? 바벨탑은 인간이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 쌓은 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무엇을 위해 삽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입니까? 자기 이름을 위해서입니까? 모두가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동분서주하면서 모든 노력과 수고를 쏟아 부으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지금의 세상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바벨탑을 악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바벨탑이 든든하게 쌓아져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무너져야 할 것으로는 추호도 바라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구든 자신의 바벨탑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자를 원수로 규정하고 대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돕지 않는다면 서슴없이 원망과 불평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무리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고 해도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선으로 보지를 않는 것입니다. 단지 내 육신이 힘들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선을 선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아름다운 것은 말씀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을 뿐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신자가 말씀대로 존재하는 것인데, 과연 신자가 말씀대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악함을 깨닫고 구원자 되시는 분의 의의 공로만을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모두가 심판 받을 자임을 알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우리를 은혜로 부르셔서 생명으로 옮기신 하나님의 일을 감사하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부르심을 입은 신자가 말씀대로 살고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것은, 멸망의 자식에 불과한 나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영원한 생명에 속한 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일, 즉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을 감사하고 찬송하며 증거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의 구속을 위해 일하신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하고 높이며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일을 자랑함으로써 자기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과 수고와 노력으로 자기 계획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8-9절에서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신 것은 우리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일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곧 구원이기에 어떤 인간의 행위도, 그것이 세상이 볼 때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해도 구원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애당초 죄와 사망의 권세에 붙들린 자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그 권세를 끊어 버릴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해서 생명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도로부터 전해진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는 것이고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거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영원 전에 작정된 일이기에 내가 어떤 일을 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행함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뜻에 의해 작정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다운 것도 죄와 사망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를 붙들고 있는 죄의 권세를 끊어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아름다운 삶을 산다고 해도 생명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붙들고 있는 사망의 권세를 끊어 버리고 우리를 구출하여 생명에 있게 합니다. 이것보다 아름다운 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복음을 위해서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도 이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름을 입은 것도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자로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