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디모데후서 1:15-18  사도와의 관계

 

<본문>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디모데후서 1:15-18)

 


<설교>

신자는 자신의 신자 됨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무한한 감사가 고백되어야 합니다. 입에 발린 감사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게 베푸신 은혜가 어떤 것인가를 안 후, 그 은혜로 말미암은 주체할 수 없는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신자라면 이런 감사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신자 됨은 우리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란 그리스도의 찾아오심과 부르심에 의해서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게 되어진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을 찾아오시고 부르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신 분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을 신자로 일컬으면서도 신자 됨에 대해서는 깊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즉 자신을 신자 되게 하신 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혹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의한 신자 됨을 생각하기보다는 단지 교회와 연관된 신자 됨을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래서 교회에 출석하고 교회의 일을 하는 자신에게서 신자 됨을 확인할 뿐 그리스도의 부르심에서 자신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누가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열고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사양합니다. 누구는 밭을 사서 나가봐야 하겠다면서 사양하고, 또 누구는 소 다섯 겨리를 샀기 때문에 시험해야 한다면서 사양하고, 또 누구는 장가들었다고 하면서 사양합니다.



잔치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 일이 바쁘다는 것 때문에 사양합니다. 잔치에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노하여 길거리에 나가서 가난한 자와 병신들과 소경들,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래도 자리가 부족하다고 하자 이번에는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이 내용을 보면, 결국 잔치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은 애당초 잔치에 초청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권하여 데려다가 집을 채우라는 것은, 잔치에 오지 않으려고 하거든 붙들어서라도 집을 채우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잔치를 베푼 주인의 의지입니다.


 

이 경우 잔치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은 잔치에 참여해서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잔치에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은혜로 여겨야 합니다. '나같은 자를 불러 주심을 감사합니다'는 고백과 함께 말입니다.



이처럼 신자에게 있어서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의 것을 받은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병신이고 소경이며 저는 자와 같은 나를 불러 주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속에 둔 신자는 복음을 위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15절)는 말씀처럼 사도 바울을 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사도 바울을 버렸다는 것은 바울과의 관계를 끊었음을 뜻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과의 관계를 끊었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믿음과 사랑으로써 증거했던 복음을 외면한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말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바울을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바울을 부지런히 찾아 만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가 오네시보로입니다. 16,17절에서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고 말씀한 것처럼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자주 유쾌하게 했던 사람이고, 바울이 옥에 갇힌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지런히 찾아 만났던 사람입니다.



바울을 버리는 자가 있는 반면에 바울이 어떤 형편에 있든 상관하지 않고 부지런히 찾아가 만나고 유쾌하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단지 바울이라는 한 인간을 싫어하고 친하게 지내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를 버렸다는 것은 곧 복음을 버린 것이고, 찾아가 만나는 것은 복음을 귀하게 여김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경우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버린다면 그것은 생명의 말씀에 대한 거부를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형편에 처하게 되든 부끄러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가 만난다면 그것은 생명의 말씀이 그만큼 귀하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즉 사람이 싫어서 버린 것이 아니고, 사람이 좋아서 찾아가 만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15절에서 말하기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바울을 버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에 대한 세상의 반응입니다. 이런 세상에 세상이 환영할만한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환영하지 않는 복음을 환영받는 복음으로 변개하고자 한다면, 결국 세상에 환영할 수 없는 부분은 모두 삭제하고 대신 세상이 환영할만한 것으로 대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미 다른 복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그 속에 거하는 신자는 사도가 전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고자 할 것이고, 그 마음에서 말하는 복음은 사람들이 환영하든 환영하지 않든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증거하려고 할 것입니다.



오네시로보에게 복음은 귀한 진리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해준 사도 바울이 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옥에 갇힌 바울을 만나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지런히 찾아가 만났던 것입니다. 바울로 인해 불이익을 당한다고 해도 개의치 않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오네시로보의 이런 마음이 바울을 유쾌하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바울과 오네시로보의 관계에는 인간적 친분이 아닌 복음이 있습니다. 즉 복음으로 인한 관계인 것입니다. 복음이 강력한 능력이 되어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해서 버리고, 자기 마음에 들고 이익이 된다고 해서 가까이 하는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인간적 관계와 복음적 관계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들고 안들고와 상관이 없고, 내게 이익이 되고 안되고와 상관이 없고, 나에게 잘대해주고 잘대해주지 않는 것과 상관없이 오직 복음이 좋고 귀하기 때문에 함께 하는 관계가 복음적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 관계는 멀리하고 멀리하지 않는 기준이 오직 자기 자신입니다. 내 마음에 들고 나에게 잘해주면 가까이하고 그렇지 않으면 멀리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할까요? 두말할 것 없이 복음으로 인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다만 복음만 마음에 두고 만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만남에 유쾌함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신자의 만남인데도 불구하고 유쾌함이 없고 미움과 시기와 다툼 등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보지 않고 다만 인간으로만 만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서로 만났을 때 여러분을 유쾌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함께 어울리고 노는 것으로 유쾌합니까? 그것도 유쾌함이 될 수 있지만, 교회에 진심으로 있어야 하는 것은 복음의 교통으로 인한 유쾌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에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모인다면 이러한 유쾌함은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오네시로보와 사도의 관계에 복음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자로 모이는 신자의 관계에도 복음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 없이 모인다면 그것은 단지 인간관계일 뿐입니다. 조그만 일에도 쉽게 기분 상하고 깨어지는 관계말입니다.



여러분께 복음이 귀합니까? 여러분을 신자로 부르시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 그리스도에게 말씀하는 복음이 감사하고 기쁘십니까? 그렇다면 그 속사람 그대로 성도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귀하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속에 있는 신자에게는 복음을 귀히 여기는 지체를 만났다는 것이 유쾌함이며 기쁨입니다. 그래서 같은 마음으로 주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18절을 보면 사도는 오네시로보의 집에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자신을 유쾌하게 하고 부지런히 찾아와 주었으니 그 대가로 하는 말이 아니라, 오네시보로가 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찾아온 것은, 곧 그 속에 복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오네시보로는 이미 그리스도의 긍휼 아래 있는 신자입니다. 즉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것은, 오네시보로와 같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긍휼을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나같은 자를 부르신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영원한 때부터 택하시고 예수 안에서 은혜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불러주신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마음에 복음은 귀한 것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 마음으로 함께 모이고 교제하고 교통함으로써 유쾌함이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