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디모데후서 2:1-6  충성된 사람

 

<본문>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으리라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디모데후서 2:1-6)



<설교>

죄로 인해서 멸망에 처한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손길이 주어짐으로써 멸망에서 건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것은 놀라운 은총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자란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이 사실을 믿게 된 자이며,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의 사건 하나만으로도 부족함이 없이 모든 채워졌음을 고백하게 되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현재의 형편이 어떠한지의 여부를 떠나서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은총만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은총의 사건으로 그 속이 채워지지 않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속을 채우려고 하게 됩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고 그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덮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은총을 기대하게 되고 자신이 원하는 은총을 받음으로 자신의 허전한 속을 채움으로써 만족을 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로써 죄 용서 받은 은혜와 평생토록 건강하게 사는 것 중 여러분은 어느 것을 원하십니까? 둘 중 어나 하나도 포기하기 싫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개 십자가의 피의 은혜는 신자에게는 기본적인 것이고, 세상의 복을 받아서 건강하게 살고 편안한 삶을 누리는 것은 추가로 주어지는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 받은 자가 믿음에 순종하며 열심히 살아갈 때 주어지는 부수적인 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전혀 알지 못한 자의 거짓된 말일 뿐입니다. 이렇게 비유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100억에 당첨된 복권과 10만 원짜리 수표를 주웠습니다. 이 경우 복권이 100억에 당첨된 사실을 알았을 때와 몰랐을 때의 반응이 어떨까요?



당첨 사실을 몰랐을 때는 10만 원짜리 수표를 바라보며 좋아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권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혹시 당첨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복권이 당첨된 사실을 알았다면 어떨까요? 수표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직 100억에 당첨된 복권만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믿음의 모습은 과연 어느 쪽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현대 기독교가 보여주는 믿음의 현실은 기뻐할 것으로 기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은혜의 귀함을 알지 못하기에 사도가 배설물처럼 여겼던 썩어질 세상의 것으로 자신의 기쁨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말하면서도 온통 자신의 삶에 매어 살아가는 모습만 난무하고 있는 것이 현대 기독교의 현실인 것입니다.



본문 3,4절을 보면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는 디모데를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일컫습니다. 이것은 디모데라는 특정 사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곧 그리스도의 군사임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라고 하면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인데 왜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그런데 이것이 사도가 말하는 믿음으로 인한 참된 현실입니다.



이 말씀에 비춰 본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서 고난을 피하고 자신이 꿈꾸는 편안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성경에서 빗나간 잘못된 생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다니게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이것은 사도가 걸어갔던 고난의 길도 거부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고난 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 받기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해서 고난을 좋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가 고난을 좋아해서 고의로 고난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싫어하기에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세상을 다니게 되면 필히 고난을 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군사로 다니는 것을 포기할 수 없기에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고난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있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군사로 다니기를 기뻐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가 그의 전부이며 기쁨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다닌다고 해서 그 대가로 좋은 것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연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건강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자녀의 출세가 약속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군사로 다님에도 불구하고 직장에서 잘릴 수 있고, 병이 들 수 있고, 자녀로 속만 썩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군사로 다니는 것을 기뻐하고 소원한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자로서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은 자가 분명한 것입니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생활을 모두 팽개치고 밖에 나가서 전도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에게는 하루하루 주어지는 모든 생활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멋대로 팽개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믿음을 먹고 사는 문제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믿으면 건강하게 잘사는 복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것들이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생활에 얽매일 때 고난은 피해야 하는 불행으로만 여기게 될 것이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군사로 다니는 것보다는 편안한 자신의 삶을 목적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란 군사로 모집한 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활에 얽매이게 되면 항상 집중하는 것은 자기에게 기쁨이 되는 일일 뿐 자신을 군사로 모집한 분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염두도 두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군사로 모집한 분의 기쁨도 관심 밖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으리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는 디모데에게 사도에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합니다.



 디모데가 사도에게 들은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탁받은 그들이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내게 부탁되어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즉 날 위한 복음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충성된 사람이란 복음에 헌신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고, 복음에 헌신한다는 것은 날 위한 복음이 아니라 나에게 복음을 부탁한 분을 생각하며 복음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자기 생활에 얽매이면 복음을 들었다 할지라도 자신에게 복음을 맡긴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복음을 들었고 복음을 알았으니 복음으로 말미암아 나쁜 것은 피하고 좋은 것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에 빠지기 십상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복음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맡은 자의 모든 삶이 복음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그릇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생활에 얽매인다면 그의 삶은 복음을 증거하는 그릇이 아니라 복음을 가리는 훼방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5,6절에서는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경기하는 자에게 중요한 것은 법대로, 즉 경기 규칙에 따르는 것입니다. 경기 규칙에 따르지 않으면 아무리 우승을 하였다고 해도 우승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즉 경기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승이나 열심이전에 규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규칙을 경기하는 자가 정할 수 없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는 대로 규칙을 정하고 자기 편한 대로 경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해진 규칙이 자신에 보기에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여도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경기 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인 것처럼 신자에게 요구되는 것도 믿음을 자기 입맛에 맞게 수정하지도 이해하지도 말고 오로지 성경이 말씀하는 것에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부름 받은 자에게 주어질 규칙이라면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 복음에 충성된 사람입니다. 고난은 싫으니까 고난이 없는 길을 가겠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 입맛에 맞게 군사의 삶을 수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길에는 면류관이 없다는 것이 사도의 말입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내용도 같은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를 수고하는 농부로 빗대어서 모든 일에 목사가 먼저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곧 규칙을 자기 입맛대로 수정해 버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곡식을 먼저 받는다는 것은 먼저 받고 나중에 받는 순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의 수고는 그때그때 어떤 대가를 받는 수고가 아닙니다. 추수할 때의 기쁨을 바라보고 수고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대가가 주어지기를 기대하지 않고 추수를 바라보고 열심히 수고하는 농부처럼 신자 역시 지금 대가를 기대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주어질 추수의 기쁨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믿음이 세상에서의 기쁨과 연결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온다면 그것이 과연 좋은 군사의 모습이며, 규칙대로 경기하는 자이며, 추수를 바라보는 농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 복음에서 벗어난 것이고 면류관이 없는 길을 달려가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충성된 사람은 복음에 헌신하는 사람이지 자신을 위해서 복음에 헌신하는 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복음이 자신에게 고난만을 안겨준다고 해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복음이 증거되는 길을 가고자 힘쓰는 그가 바로 그리스도께 충성된 사람이며 진심으로 복음을 맡은 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