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디모데후서 2:7-13  참아야 하는 이유

 

<본문>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찌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디모데후서 2:7-13)



<설교>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복음을 알게 된 것은 복음을 맡은 자로 부름 받은 결과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부르셨다는 것은 분명 부르신 분의 뜻이 있는 것이고, 그 뜻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복음을 맡겨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은 항상 복음을 담은 그릇으로써 복음을 나타낼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자기 생활에 얽매인다면 부르신 분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생활에 얽매인다는 것은 곧 자신을 위해 살아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삶에서 복음이 증거될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사도는 디모데를 좋은 군사로 일컫는데, 군사는 싸움을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지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군인의 먹고 사는 것, 즉 모든 생활은 국가가 책임을 집니다. 하지만 군인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군인은 국가가 주는 대로 먹고 마시며 생활하면서 군인다운 자로 훈련을 받아서 군인다움을 보여주면 됩니다.


 

신자가 그와 같은 존재입니다. 신자로 부름을 받은 것은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먹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책임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먹고 살면서 신자로서 가야할 길에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규칙대로 경기하는 모습이고, 추수 때를 바라보고 열심히 수고하는 농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신자에게는 믿음으로 인한 기쁨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사도들을 통해서, 그리고 수많은 신앙의 인물들을 통해서 확인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기쁨이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나에게 세상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기쁨과 재미를 충족시켜 주기를 원하는 기대감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가 기쁨이 아니고 여전히 세상의 좋은 것을 기쁨의 도구로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에게는 그리스도가 기쁨이었습니다. 때문에 어떤 처지에 있다고 해도 그리스도는 변함없이 그들과 함께 하고 계셨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이 그리스도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기쁨과는 차원과 수준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7,8절에서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는 것은, 단지 머릿속으로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다시 사신 예수라는 것은,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뜻입니다. 물론 신자라면 예수님을 죽은 분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사신 예수님으로 믿는다면,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부지런히 일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우리들을 그냥 바라만 보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대신 그리스도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한 자로 삽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일하심을 뜻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그리스도가 인도하시고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총명입니다. 이 총명이 있는 신자는 그리스도가 곧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살으신 그리스도를 기억만 해도 두려움이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난으로 가게 된다고 해도, 고난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설사 죽음에 이르는 길로 가게 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임을 알기에 얼마든지 순종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직 그리스도로만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가 믿음을 말했으나 얼마나 믿음과 상관이 없는 길을 갔던가를 능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로 기뻐하기보다는 세상의 것이 주어지는 것에서 재미와 기쁨을 누리려고 했던 우리들의 불신앙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신자가 그리스도로 기뻐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귀함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귀함에 무지하다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고(아무리 십자가 은혜를 안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 은혜가 그리스도로 기뻐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지 않는다면 은혜에 대해 무지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에 무지한 것은 자신의 무가치함과 어둠에 자리에 떨어졌던 자신의 악함을 안고서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은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추상적으로만 그리스도를 외쳤을 뿐, 어둠에 있던 인간의 현실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가 가슴 깊이 몰려오지 않는 것이고, 다시 살아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로 기뻐하는 것에 대해서도 무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항상 자신만 바라보면서 세상의 것이 주어지는 것으로 울고 웃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가 두려워 할 것이 무엇입니까? 병 들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내 가정에 어려운 일이 올 수 있다는 것으로 두려워해야 합니까? 빌립보서 4:6-7절을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합니다.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은, 기도하면 모든 염려가 되는 문제들을 해결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맡길 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즉 어려운 일이 있을까 두려워 말고, 어떤 어려움에서도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강입니다.



9절을 보면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비록 옥에 갇혔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쉬지않고 활동 합니다. 말씀이 활동을 한다는 것은, 다시 사신 그리스도가 일하심을 뜻하기 때문에 사도가 옥에 갇힌 고난에 처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사도에게서 떠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예수님에게 자신에게 함께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이 어떤 어려움에 매인다고 해서 예수님도 매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자신의 뜻대로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신자는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10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는 택한 자를 위해 모든 것을 참는다고 말합니다. 모든 고난과 핍박을 참는 것은 사도 자신은 택한 자를 위해 부름 받았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에게 복음을 맡기시고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택한 자로도 구원을 영광과 함께 얻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에게 매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부르신 분의 뜻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를 부르신 분의 뜻에 의해 세상이 움직이고 있으며, 세상은 지금도 그분의 뜻에 복종되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원하는 나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곧 불신앙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11-13절을 보면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찌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말합니다.



미쁘다는 것은 ‘미덥다’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즉 주와 함께 죽으면 살고 참으면 함께 왕노릇하고,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한다는 말이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신뢰하는 신자라면 죽는 것도 고난도 두려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으면 살 것이고, 고난을 참으면 왕노릇 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고난을 참지 못하는 것은 주를 부인하는 것이고, 주를 부인하면 주님 역시 나를 부인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신자는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고난도 참게 되는 신앙에 굳게 서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일향 미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한결같이 신실하신 분입니다. 신자의 구원이 가능한 것도 그리스도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두려움에서 멀어지고 모든 일에서 참게 되고, 눈앞의 현실보다는 장차 주어질 영광을 소망하는 자로 자라갑니다. 그래서 걱정과 염려가 감사와 찬양으로 바뀌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