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디모데후서 2:18-21  합당한 그릇

 

<본문>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디모데후서 2:18-21)



<설교>

20절의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라는 구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귀히 쓰는 그릇이 있고, 천히 쓰는 그릇이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이러한 말을 대할 때 사람들이 갖게 되는 공통적인 생각은 ‘나는 어떤 그릇일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릇으로 쓰이기를 원합니까? 두말할 것 없이 귀히 쓰는 그릇이겠죠? 그런데 하나님이 귀히 쓰는 그릇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실 귀히 쓰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지도 않으면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되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귀히 쓰는 그릇이라는 것을 자신이 귀하게 되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는 그릇이니까 귀하게 여기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귀히 쓰신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용도인 것이지 사용되는 그릇은 아닙니다. 즉 귀히 쓴다는 것은, 귀한 일에 사용하신다는 뜻이지 그릇이 귀하다는 의미가 아니란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6절을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세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음을 의미하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택하였다는 말은 자기 구원으로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가령 여러분이 망치를 집어 든다면 망치를 사용하여 하고자 하는 일을 계획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망치를 위해 망치를 집어 든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위해 망치를 집어든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론적인 시각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귀히 쓰는 그릇도 내가 귀하게 여김 받는 것으로, 즉 자기 구원론적인 시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깨끗하게 함으로써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이것을 ‘만약 누구든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하나님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는 내용으로 이해해 버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내용과 모순이 됩니다. 왜냐하면 선택받을 조건을 미리 내가 갖추어 놓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의 조건을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쓸 만한 그릇이어서 불러서 귀히 쓰시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21절의 내용은 자기를 깨끗케 함으로써 귀히 쓰는 그릇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깨끗케 한다는 것은 무슨 경건주의나 금욕주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를 범하지 않고 깨끗한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라는 뜻이 아니란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이런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한 이런 것은 진리에서 벗어난 다른 복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면서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님의 피만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깨끗케 하는 것은 피의 은혜를 바라봄으로써 용서의 은총 안에 사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귀히 쓰는 그릇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용서의 은총 안에서 살아갈 때 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용서의 은총의 흔적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사 쓰시고자 하시는 귀한 일이고 신자는 이 일을 위한 그릇으로 택함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귀히 쓰는 그릇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담아 주신 긍휼과 사랑과 자비하심을 나타내고 증거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귀히 쓰는 그릇입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이 등장하여 이것을 훼방합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에 빠져서 긍휼과 자비하심을 훼방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18,19절을 보면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후메내오와 빌레도 등 에베소 교회에 있었던 이단들은 영의 부활은 인정하나 육체의 부활은 부인하였습니다. 이러한 거짓된 말들이 진리를 훼방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흔들림이 없이 굳게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곧 견고한 터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위에 서 있는 신자는 어떤 유혹에서도 흔들림이 없게 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위에 서 있는 신자는 견고한 터 위에 있기에 불의에서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신자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귀한 그릇으로써 우리가 받은 긍휼과 자비를 증거하기 위해 진리를 분변하면서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며 오직 하나님께서 내 속에 담아 두신 것만 나타내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귀히 쓰는 그릇입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라면 그 내용물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만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욕심이나 공로와 같은 것들은 긍휼과 자비하심을 훼방할 뿐입니다. 그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서 하나님이 담아 두신 것만 나타내고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귀히 쓰는 그릇입니다.



롬 9:21-23절을 보면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라는 말을 합니다.



진흙으로 어떤 그릇을 만드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토기장이의 권세입니다. 나를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항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나를 지으신 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를 왜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었습니까? 내 마음에 안듭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를 만드신 뜻이 무엇입니까?’라며 나를 만드신 분, 나를 붙들고 계시는 분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릇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망령되고 헛된 말로부터 자신을 깨끗케 하십시오. 인간의 힘이나 열심을 따라가지 마시고, 사나죽으나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만을 여러분 속에 간직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귀히 쓰는 그릇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에는 더러운 것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오직 깨끗한 것만 담겨 있게 되는 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하심입니다.



이 그릇에는 교회 부흥이나 목회 포부 등 인간의 욕망이 담겨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것은 인간의 욕망에서 흘러나오는 더러운 것들이고, 그 더러운 것을 속에 담아두고 있다면 귀히 쓰는 깨끗한 그릇의 역할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속이 무엇으로 채워지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사 십자가 아래로 부르심으로써 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자비하심과 용서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속은 용서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춤추며 기뻐하고 감사함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속이 과연 이러한 상태입니까?



세상의 것으로 내 속을 채우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더러움에 던지는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속으로는 귀히 쓰는 그릇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릴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용서의 은총으로 그 속이 채워질 때 여러분은 귀히 쓰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