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강) 디모데후서 2:22-26  주의 종

 

<본문>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찌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디모데후서 2:22-26)



<설교>

 여러분은 자신이 신자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설마 ‘나는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신자다’라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시겠죠?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인 것은, 여러분의 선택도 의지도 아니라는 얘기를 수없이 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믿고자 스스로 결정해서 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겉으로 보면 여러분의 생각과 의지에 의한 여러분의 결정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올 수 있는 생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자 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결단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11절을 보면 사도는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는 말을 합니다. 즉 사도는 자신의 사도됨을 자신의 결정과 의지에 의해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도로 세우신 분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도로 세우신 분의 의도는 복음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위해 사도로 세우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는 오직 복음을 위해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것이 사도로 세움 받은 자신이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복음을 위해 세움 받은 사도직임을 알기 때문에 사도직을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대접받고 많은 사람 위에서 다스리는 것은 사도로서 분명 어긋난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자신이 목사 된 것에 대해 사도와 같은 이해를 하고 있다면, 현대 교회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목사의 문제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목사직을 이용해서 대접받고자 하는 것도 없을 것이고, 목사직을 내세워서 마치 교회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지도 않을 것이고, 목사직을 다른 신자와 구별하여 우월한 자로 여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신자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여러분을 신자로 세우셨겠습니까? 2:4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뜻이 바울을 사도로 세운 것이고, 여러분을 복음을 아는 신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 되어진 신자의 삶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 달려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신자라는 존재로 세상에 머물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에 취해 살 사람이 아니고, 세상을 전부로 여겨서도 안 될 사람인 것입니다.



신자 아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길을 자신의 정욕대로 결정하고 힘써 달려가면 됩니다. 그러나 신자의 삶의 길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그 길로 밀어 붙이시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일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그 일에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로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결국 그 마음에 남는 것은 자기 자신 뿐입니다.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것 밖에 없기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의 도구다’라는 말을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마음대로 사용하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왕이면 이렇게 사용해주세요’라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쓰이는 도구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된 것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택한 다른 사람을 위해 나를 신자되게 하셨다는 것을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모두 구원해서 진리에 아는데 이르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서 나타나고 증거되어야 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복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말합니다. 신자가 정욕을 피하고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자가 그러한 것을 좇음으로써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하지만 사도는 신자에게 어떤 유익을 안겨 주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세움 받은 것이 신자이기에 신자로서 당연히 좇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유익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유익은 자연히 맺어지는 열매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신자는 자기에게 돌아올 유익을 기대하기보다는 복음을 좇아 행할 때 자연히 맺어지는 열매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은 그리스도께 있는 것들입니다. 즉 신자가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아는 자로 산다면 자연히 그리스도께 있는 것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에게서 그리스도의 것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청년의 정욕을 좇기 때문입니다. 청년의 정욕은 단지 젊은 사람들의 정욕이라기보다는 세상에서의 성공에 모든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청년의 특징을 두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년의 정욕을 좇는 길에서는 그리스도의 것이 나타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23,24절을 보면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라고 말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은 인간의 자랑거리와 업적을 두고 경쟁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서는 다툼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이기고자 하는 욕망만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업적과 자랑거리고 상대방을 누르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다툼은 필연코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주의 종은 다투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의 종은 흔히들 말하는 목사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주를 좇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주를 좇는 분들이라면 여러분이 곧 주의 종입니다.



주의 종은 자신의 정욕이 아니라 주를 좇기 때문에 자신의 자랑과 업적으로 상대방과 경쟁하고 이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랑하고 나타내는 것이라면 오직 주님의 업적이고 주님의 행하심입니다. 따라서 다툼은 자연히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주의 종으로서 주님을 생각하게 되면, 신자로서 갈 길은 분명히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내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을 나타내는 길입니다. 저 역시 목사로 세움 받은 사람으로서 갈 길은 분명히 정해져 있습니다. 해야 할 말도 분명히 정해져 있습니다. 저를 위한 길이 아니고 저를 위한 말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길이고 말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이해하는 목사직입니다.



물론 이 길은 저의 본성으로는 도무지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여전히 저의 본성은 저로 하여금 제 안위를 걱정하게 하고 때로는 교회를 향한 유혹으로 끌고 갑니다. 그러나 저를 목사로 세우신 하나님이 저를 붙잡아 제가 가야 할 길로 밀어 넣고 있음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로 인해서 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흔적들이기 때문에 저 역시 저의 어떤 것으로도 저를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우리의 본성을 따라 살면 편합니다. 저 역시 저의 정욕을 따라 말을 한다면 여러분의 욕망과 일치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도 여러분도 우리의 욕망을 따라 살 사람으로 세움을 받지 않았습니다. 평생토록 주를 좇아야 할 주의 종으로 부름을 입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달려가야 할 삶의 방향까지 이미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 자로 부름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정욕을 좇아 살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좇는 주의 종의 길을 갈 때 자연히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은 사라지게 되고, 다툼 역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생명이 아닌 것, 진리가 아닌 것으로 경쟁하고 이기고자 하는 모든 것이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입니다.



주를 좇아 살기에 자연히 주를 위해서 온유하게 되고 참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생각함으로 자연히 참게 되는 것이 곧 온유인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이러한 온유로 인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지 않습니까?



주의 종을 가르치기를 잘하는 자라고 하는 것도, 성경을 잘 가르친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것 역시 목사의 고유 권한이 아니라 주를 좇는 자로 하나님께 부름 받은 모든 성도를 일컫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위해 살아갈 때는 교회에서의 징계도 복음을 위한 것으로 행하게 됩니다.



25,26절을 보면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찌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경우 교회에서 행하는 징계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또는 목사를 보호하기 위한 경우가 태반입니다. 즉 교회에 큰 문제를 일으키거나 목사를 비방하고 도전할 때, 교회를 위해서 또는 목사를 위해서 그 당사자를 교회로부터 쫓아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거역하는 자는 징계하라고 하면서도 징계의 목적을 징계 받는 자의 회개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역하는 자는 진리를 거역한 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는 징계하되 온유로 하라는 것은, 거역한 자의 구원을 위해 징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징계는 보복도 아니고 징벌도 아니라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도 진리를 거역한 자들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온유로 받으심으로써 신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거역하는 자는 징계하되 나를 받으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타내는 징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거역하는 자라고 해서 그가 멸망 받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돌이키사 그리스도를 아는 길로 가게 하실지 누구도 모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람에게 자연스런 것은 자신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복음을 위해 산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본성에 자연스런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복음을 위한 길로 가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소원하면 주를 바라보는 것이 신자이며 주의 종입니다. 신자 됨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할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