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디모데후서 3:1-9  마지막 때

 

<본문>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디모데후서 3:1-9) 



<설교>

교회를 가리켜서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때에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으로 세워진 것이 교회이고,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께 소속된 모임으로써 종말을 기다리고 소망하는 세상과는 다른 모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을 생각지 않고 관심도 없이 눈에 보이는 현실을 바라보며 현실세계에 관심을 둔 채 모이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단지 종교단체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시면서 다시 오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다시 오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때는 세상을 끝내겠다는 것입니다.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전혀 동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건 다시 오시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의 오심은 갑작스런 사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는 예수님의 오심은 갑작스런 사건이 아닙니다. 종말을 기다리고 소망하며 살았던 교회에 있어서 예수님의 오심, 즉 종말의 사건은 기쁨의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의식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이 임할 때 세상의 형편이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처럼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간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무슨 문제란 말입니까? 노아는 먹고 마시지 않았습니까? 시집가고 장가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노아는 괜찮고 다른 사람은 안되는 것입니까?



물론 노아도 세상 사람과 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갔습니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예고하신 심판을 생각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즉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면서도 세상은 망한다는 종말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다른 삶입니다.



교회가 종말론적 의식으로 모이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미친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말론적 의식이 사라졌기에 현실이 보이게 되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에 모든 의미와 가치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좋고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함께 하고 돈이 함께 하는 것을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라고 하나 교회가 아닌 것이고 종교단체의 모습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이 과연 여러분을 얼마나 긴장되게 합니까? 신자가 말세를 알고 있고 또 믿고 있다고 해도 말세에 대한 의식이 없이 살고 관심도 없다면 말세를 믿지 않는 자와 다를 것이 뭐겠습니까?



교회가 종말론적 의식으로 모이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매이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종말의 때가 되었을 때 참으로 귀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긍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야 돈이 생명인 것 같고 육신으로 사는 것이 가장 큰 관심이 되지만, 종말론적 의식으로 살게 되면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고, 어떤 환경에서 살았든 상관없이 종말, 즉 하나님의 심판이 세상에 개입하게 되면 모든 것은 끝장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말의식으로 살아가는 신자는 항상 삶의 방향이 그리스도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기 위한 삶이 되고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면 방주를 준비하는 노아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지만 말세를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때만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은 말세가 아니라는 것이 됩니다. 말세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처음 오셨을 때부터 이미 시작된 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신 후부터 세상은 말세를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른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무엇 때문에, 무엇으로 고통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지금이 곧 말세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말세를 살아가는 신자로서 고통스러운 것이 있습니까? 삶이 어렵고 힘들어서 고통스럽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고통은 말세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겪는 것입니다. 삶이 어렵고 힘들면 말세를 아는 것과 상관없이 누구나 고통스러워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말세를 살아가는 신자에게 고통스러운 때는 언제입니까? 2-5절을 보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는 말을 합니다. 바로 이것이 말세를 살아가는 신자에게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과연 이러한 것으로 고통스러워합니까?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들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 ’돈을 사랑하는 것‘ ’자긍하는 것‘ ’교만한 것‘ 훼방하는 것’ 등 말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에게서 발산되는 것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가지 않습니까?



신자라고 해서 자기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자긍하지 않고 모든 것에 감사하고 남을 훼방하지 않고 부모에게 순종하면서 그렇게 살아갑니까? 우리 역시도 세상이 사는 것처럼 살아간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점은 자신의 그런 것들로 인해서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세에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입니다.



신자가 말세에 대한 의식, 즉 종말론적인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마지막 때의 자리에 서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마지막 때의 자리에 서서 세상을 보게 되면 세상에 소망을 둘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나의 성공이나, 자식의 출세, 재물, 그러한 모든 것들이 결코 소망이 되는 것들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절감할 뿐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소망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과 희생과 봉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 사랑에 매어 있고, 돈을 사랑하고, 자긍하고 훼방하고 거룩되지 못하고 육체의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한 자기 실체일 때, 결코 덤덤할 수가 없게 됩니다.



마지막 때 그리스도가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나보다 더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나보다 더 사랑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에게 매인 자로 살아가는 자신을 바라볼 때 애통하게 되고 고통스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세의 때를 살아가는 신자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의 다른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 말세의 때를 가리는 거짓된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말세의 때보다는 현재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실망하고 불평하는 길로 이끌어 가버립니다.



6,7절을 보면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인을 유혹하는 것처럼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신자를 유혹하는 것이 거짓된 교훈입니다. 거짓된 교훈의 특징은 여러 가지 욕심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 교훈은 아무리 배운들 진리에 이르는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거짓 교훈 역시 말세의 때를 살면서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잊지 않는다면 그 정체를 파악하면서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다만 말세의 때를 잊어버리고, 무엇이 나를 생명에 이르게 하는 진리인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여전히 자기 사랑으로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거짓 교훈에 미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말합니다. 행함은 경건의 모양입니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은 되지 못합니다. 경건의 능력은 오직 말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하는 행함을 요구하며, 믿는 자로 하여금 세상을 바라보게 하고 소망을 두게 하는 거짓된 교훈으로부터 그 마음이 돌아서야 합니다.



말세의 때에 중요한 것은 진리입니다. 진리만을 중심에 둘 때,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자신에 대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면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마음속에 새기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