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강) 디모데후서 3:15-17  성경

 

<본문>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디모데후서 3:15-17)



<설교>

신자는 성경을 옹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성경을 옹호하는 수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믿는 자로 오해를 하는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서 말하는 초자연적인 사건들, 즉 기적을 여러분은 모두 믿는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하나님의 기적들은 단지 자연 현상에 의한 것으로 말한다면 성경을 믿지 않는 불신자처럼 취급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홍해 사건을 믿고 오병이어를 믿습니다. 그러면 기적을 사실 그대로 믿는 여러분과 단지 자연현상을 신화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성경의 내용들을 사실 그대로 믿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성경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말합니다. 이것이 단지 예수님이 이런 기적을 베푸셨다는 것을 믿으라고 기록된 것이겠습니까?



성경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의 생명을 위해 나눠주실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을 믿는다는 사람이 여전히 세상의 떡을 구하며 살아간다면, 결국 오병이어의 기적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성경을 옹호하는 수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내용을 많이 알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성경의 내용을 아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안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에 이르는 지혜는 성경을 배우고 읽는다고 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함인 것이지 단지 성경에 있는 기적의 사건들을 의심 없이 믿게 하기 위해 믿음을 주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신자는 성경의 어떤 기적에 대해서도 ‘이것이 사실일까? 아닐까?’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기적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믿음의 관계에 붙들리기를 소원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경에서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도 구원의 지혜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육신에 관심을 두고 성경을 보게 되면, 욕망의 눈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구원의 지혜에서는 멀어진 채 성경을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도구와 수단으로 활용을 하게 될 뿐입니다. 이런 수준에 있으면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을 사실로 믿는다고 해도 기적을 믿지 않는 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 굳게 세워 놓기 위해 하나님이 누구시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계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평안의 삶을 살아가는 신자로 붙들어 놓기 위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담겨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성경을 이해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있기를 소원하면서 말씀을 대할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자이면서 성경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과 자비와 은총을 마음껏 누리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싶은 간절함이 없는 것이고, 아예 하나님을 알아야 할 필요성조차 갖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이 이미 세상에 빼앗겨 있기 때문에 세상을 사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간절함이 없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여전히 인간의 실상에 대해 무지한 것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의 실상이 어떠한가를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상을 보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마음도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나 자비는 다만 자신의 인생을 꽃피우게 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관심을 끌만한 열심과 행동이 중요한 것이지 구원의 지혜를 얻게 하는 성경에 대해서는 마음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해도 구원의 지혜를 마음에 두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는 것을 하나님이 보실 때 기뻐하는 행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6,17절을 보면 성경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으로 기록된 것이 성경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향한 중심적인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자신의 뜻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잘못됨을 책망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교훈하고 바르게 하고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이런 신자로 고침받기를 소원하고 있습니까?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으로 고치는 능력이 되기를 소원하느냐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이 우대하고 높이는 사람 되는 것을 꿈꾸기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자로 바르게 되어 가고 고침 받고 새롭게 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그것이 믿음에 의해 살아가고 있는 흔적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본다면 우리 자신들은 신자 됨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를 출석하는 것이 취미생활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좋으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왜 하나님을 좋다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여러분께 좋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원하시는 무엇인가를 받았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삶에서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신 것입니까?



신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좋으신 분으로 다가올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입술로 하나님을 좋으신 분이라고 말할지라도 실제 그 마음에 좋은 것은 따로 있을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은 하루 먹고 사는 것으로 하나님을 좋으신 분이라고 하지 않지만, 신자는 하루 먹고 사는 것에서도 하나님을 참으로 좋으신 분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좋으신 하나님을 신자는 성경으로 말미암아 만나게 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대한다면, 성경은 여러분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교육하면서 온전한 자로 고쳐갈 것입니다. 이런 신자로 고침 받기를 소원하면서 이것을 위해 서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가 항거할 수 없는 크나큰 능력으로 우리를 장악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시기를 기도하면서 날마다 고침 받아 가기를 힘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