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강) 디모데후서 4:1-5  네 직무를 다하라

 

<본문>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디모데후서 4:1-5)



<설교>

디모데후서 4장은 사도 바울이 어두운 감옥에 갇혀서 이제 죽을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고 쓰고 있는 내용입니다. 즉 바울에게는 디모데에게 마지막 남기는 유언과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는가는 6절의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관제는 제물 위에 붓는 포도주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그러한 관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제물 위에 붓는 포도주가 모두 부어지는 것처럼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을 위해 모두 쏟아 부어진 상태로 바라보는 심정으로 4장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기 위해서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1절)



엄히 명한다는 것은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엄한 명령이라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이처럼 엄히 명한다는 말을 함으로써 바울의 말은 결코 가볍게 넘길 내용이 아니며, 바울의 말 대로 해도 되고 안해도 그만인 것도 아니라 인생이 다하는 날까지 신실하게 감당해야 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자신이 남기는 말을 두고 엄히 명한다고까지 말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단지 마지막 말을 남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가 평생을 두고 걸어가야 할 인생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길은 신자로서 필히 가야하는 길이기에 엄히 명한다는 말로서 경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예수 앞과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바울이 지금 하고 있는 말의 권위가 어떠함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모든 판단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결국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하여 세상을 심판하신 후에 장차 나타나실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의 나라에 참예할 자와 영원한 사망에 처할 자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신자가 나아가야 할 정당한 길이기 때문에 바울로서는 엄히 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즉 디모데가 바울이 말하는 삶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은 무엇입니까? 2절을 보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엄히 명하고 있는 것은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써야 할 일이 말씀을 전파하는 것임을 엄히 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굳이 엄히 명하지 않아도 신자라면 신자가 실천해야 할 부분이라고 인정을 할 것인데 왜 엄히 명하는 것입니까? 단지 전도에 힘쓸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말일까요?



우리는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신자의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전파하라는 말에서 전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전도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하고 예수 믿게 하는 것이야 말로 신자로서 해야 할 일이고 사명이라는 말을 교회가 아주 많이 강조하였기 때문에 말씀 전파, 즉 전도는 신자라면 해야 할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엄히 명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전도하는 것을 신자가 하지 않으면 안될 엄한 하나님의 명령인 것처럼 말함으로써 교인들을 교회밖으로 내 보며 사람들을 전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파하라고 엄히 명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전도에 대한 사명을 엄히 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말씀 전파하는 것은 단지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말씀전파는 오래참음으로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역할은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죄에 대해 경책하고 경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경책과 경계하심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자신을 경책하고 경계하는 말을 듣고 기분 좋아하겠습니까? 요즘 교회가 말하는 전도는 어떻게든 사람의 마음을 끌어서 교회로 데려오는 방식입니다. 교회만 데려다 놓으면 구원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교회가 사람을 경책하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현실을 잘 말해주는 것이 3,4절의 말씀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사도가 말하는 현대의 실상은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귀는 진리에서 멀어져 있고, 다만 자신을 즐겁게 해주고 자기 욕심을 옹호해주는 말을 교훈으로 받아들입니다. 진리에서 돌이켜 생명이 없는 허탄한 이야기를 즐겨하고 좇는 것이 현대인들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욕망을 파헤치며 모든 악한 것과 허물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직무라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을 엄히 명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세상이 싫어하고 듣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 바른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즉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야 말로 그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거부를 받는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오래 참음이라는 말을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왜 고난이 있습니까? 말씀을 전파하면 고난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필히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말씀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교회 밖의 사람들이 디모데의 교훈을 거부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으로부터 그러한 배척과 고난을 받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말하는 교회가 바른 교훈으로부터 귀가 멀어져 있는 것이 당시의 실상이었고 지금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갈 1:8-10절을 보면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는 다른 복음에 대해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곧 저주와 연결됩니다. 그 다른 복음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는 말인 것입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말을 한다면 그것은 분명 다른 교훈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을 가리고 사람들이 원하는 다른 하나님을 제시하는 거짓말이기 때문에 복음을 가장한 다른 복음이며, 결국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나 따르는 자는 생명과 상관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히 4:12-13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며 모든 허물과 부끄러움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내가 곧 심판을 받아야 할 자임을 철저히 알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어떠함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경책하고 경계하며 부끄럽게 합니다. 그것이 내 안에 말씀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디모데의 직무이며 우리의 직무인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를 가지고 일하시면서 자기 백성을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전도인의 직무에만 힘을 쏟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바른 교훈의 말씀을 그대로 전파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생각하기 이전에 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내 자신부터 나를 경책하고 경계하는 말을 거부하고 싫어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전도인의 직무에 힘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말씀을 전파하라는 이 말씀에서 먼저 내 자신이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진심으로 원하고 사모하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