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 디모데후서 4:6-8  선한 싸움

 

<본문>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디모데후서 4:6-8)



<설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파할 것을 엄히 명합니다. 말씀 전파를 엄히 명하는 이유는 마지막 때의 세상 현실이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허탄한 이야기를 좇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현실이 이러한 때, 말씀을 전파할 것을 엄히 명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좇지 않는다는 것은 교훈 자체를 거부하는 이방인들을 염두에 둔 말이 아닙니다. 교훈을 받아들이지만 바른 교훈이 아니라 사람의 욕망을 옹호하는 다른 교훈을 좇는 이가 많은 현실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전파하라고 엄히 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싫어하고 외면하는 현실에서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라는 의미로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겠습니까? 그것도 하나님 앞과 예수 앞과 나타날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할 정도로 심각하게 말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도가 디모데에게 촉구하고 권면하는 것은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싫어하는 현실에서 디모데가 해야 할 직무는 바른 말씀을 전파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인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보면 사도에게 있어서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곧 싸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른교훈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른 교훈을 싫어하는 세력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돌이 날아온다고 해도 바른 교훈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이 사도에게는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전파하는 직무를 하고 살아가는 신자에게 선한 싸움을 필히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른 교훈을 싫어하는 세태 속에서 바른 교훈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로부터 반대와 공격을 받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기에 결국 선한 싸움의 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전도인의 일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높임을 받는 일이 아닙니다. 사도가 복음을 전함으로써 당시의 사람들에게 위대한 전도자로 칭송을 받고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것처럼 고난의 길을 걸어갔을 뿐입니다.



그러한 고난의 길에서도 말씀을 향한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이 선한 싸움인 것입니다. 자신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사도로 부름 받은 자신이 가야할 길임을 알고,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만 증명한 것이 곧 바울이 믿음을 지킨 것이었고, 예수님을 만난 후로 평생을 달려온 길이기도 합니다.



전도자의 직무는 전도를 해서 많은 사람을 교회로 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1:11,12절에서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말씀한 것처럼, 진리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굳게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할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부름 받은 신자는 어떤 고난도 두려워 할 것 없이 말씀만 전파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것이고 선한 싸움에 참여된 신자입니다.



고린도전서 2:3-5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도가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떤 것이 무엇일까요?



사도는 복음을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사람들이 듣고자 하는 말,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고,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못박힘을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외의 다른 것은 절대 설교하지 않기로 결심했는데 혹시라도 인간적 지혜가 드러날까 굉장히 신경을 쏟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심히 떨었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사실 그도 자기 지혜로 전하고 싶은 유혹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의 갈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사람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목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목사가 사람들을 좋게 하는 말을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자기 추종자를 끌어 모으기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많이 확보함으로써 그것을 교회 안에서의 자신의 힘으로 구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말씀을 전파하기만 하면 됩니다. 자기 추종자를 계산한다면 이미 그는 목사가 아닙니다. 목사가 가장 크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혹시 강단에서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전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교인 수를 한 명이라도 더 늘려보려고 세상적 수단을 동원해 보고 싶은 유혹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복음은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일 뿐 아니라 전도를 주관하는 이도 성령님이시며 인간의 말은 단지 그 복음과 능력이 전해지는 통로일 따름임을 알아야 합니다. 구태여 교회 성장 세미나에 열심히 참여할 필요 없이 십자가만 전하면 된다는 굳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인을 늘려주는 것은 하나님의 몫일 따름입니다. 복음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목사가 말씀 전파의 길에서 벗어나게 되고, 선한 싸움을 포기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고 교회를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좀 더 큰 교회를 이룸으로써 자신의 자존심을 높이고자 하는 강렬한 유혹이 목사로 하여금 바른 교훈을 외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염려는 오늘 날의 목회자가 염려하는 것과 판이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유명 목사의 설교를 이곳저곳에서 짜깁기해서 자기 것인 양 그럴듯하게 포장하거나 심지어 자구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전하는 자도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성령의 힘, 아니 심지어 자신의 지혜도 아니라 기계의 힘을 빌려서 전합니다. 나아가 온갖 감언이설로 교회 안에 자기 추종자 그룹을  만드는 일에 노력합니다. 교인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교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한 것에만 신경을 씁니다.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위해선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사도로서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말하는 사도의 말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과연 지금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목사는 교인이 자기 말을 너무 잘 따를 때에 두려워해야 합니다. 자기가 진정으로 십자가 복음만 제대로 전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지혜로 열렬 추종자 그룹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따져 보아야 합니다.



전자의 경우라 하더라도 신자들이 진정으로 목사보다 예수를 더 따르고자 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자기의 지혜를 예수와 십자가라는 단어로 그럴듯하게 포장해 전한 것일 뿐입니다.



8절을 보면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말합니다.



의의 면류관은 바울이 달려간 길에만 예비되어 있습니다. 즉 다른 길에는 의의 면류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은 오직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실 뿐입니다. 인간을 육체대로 보지 않으시는 분이기에 인간의 공적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을 알고, 주님이 나타나심을 사모하면서 그의 나라를 소망하고 살아간다면, 절대로 바른 교훈을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를 좋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나를 책망하며 의로우신 주님만 바라보게 하는 말씀을 원할 것입니다.



말씀은 목사에게도 신자에게도 자신의 전부를 걸어야 할 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우리를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하고 거부한다고 해서 내가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이런 굳은 마음이 신자를 선한 싸움의 길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말씀에 대해 이런 마음인가를 살펴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