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강) 디모데후서 4:9-18  바울을 버린 사람

 

<본문>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디모데후서 4:9-18)



<설교>

누군가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대개는 그 말을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이다’는 의미로 말합니다.



즉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길로 인도하시는 분임을 믿고 하나님이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 설사 그 길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 길이라고 해도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헌신의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로 말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맡긴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고 믿음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믿음은 결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내는 수단도 방법도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를 붙들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한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를 통해서 그러한 믿음을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평생을 예수님을 위해 살았던 위대한 사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도의 말년이 어떠합니까?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죽음을 앞에 두고 쓴 편지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평소 바울을 흠모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려 싸여 그 업적에 대해 칭송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 아래 죽는 것이 아니라 옥에 갇혀서 외롭고 쓸쓸하게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며 믿음에 이끌림 받았던 사도의 인생입니다.



이러한 사도의 인생에는 무엇하나 인간이 원하는 것은 담겨있지 않습니다. 대개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결과만을 바라보며 바울을 위대하다고 하고 흠모하기도 하지만 바울은 그것으로 인해서 모진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의 관심은 고난은 담겨 있지 않고 인간의 욕망만을 충족시키는 사도의 위대한 업적에 있었던 것입니다. 쓴 것은 뱉어 버리고 단 것만 삼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에 붙들려 살았던 바울의 인생은 모든 사람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고난으로 인도받았음을 분명히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본문을 보면 바울의 곁에는 남은 사람이 없습니다. 10-11절의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바울 곁에 있던 사람들 중에 누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바울을 떠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바울이 받는 고난과 고통을 바라보면서 바울처럼 예수님을 위해 살 마음이 없어서 떠났는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신령하고 위대한 일생을 살았다고 일컬어지는 바울의 마지막은 이름도 빛도 없이, 모든 사람이 바울을 떠나간 가운데 외롭게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을 주님을 위해 살았던 사도의 일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예수님 믿으면 복 받고 잘 살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남발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예수님이 어떤 길을 가셨고, 사도 또한 어떤 길을 갔는가에 대해서는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인간의 욕망만 만족시키고자 하는 허황된 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모아들여서 교회를 키우고자 하는 욕망의 단체일 뿐인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세상의 복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상상해 낸 하나님일 뿐입니다.



교회가 증거할 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이끌어 간 사도의 길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러한 길로 인도 받는다고 해도 순종해야 할 것을 증거해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한 증거를 통해서 누가 과연 예수님을 목자로 바라보고 예수님만 좇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옥에 갇혀서 쓸쓸히 죽음을 맞고 있는 바울 앞에서도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산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 말은 결국 바울 당신은 예수를 잘못 믿었다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13절의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는 내용을 보면, 세상을 떠나는 바울이 필요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겉옷과 가죽종이에 쓴 것, 즉 하나님의 말씀만을 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 세상을 떠날 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옷 한 벌과 예수님을 소망하는 믿음이면 족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토록 세상 것을 갖지 못해 안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까? 결국 인생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를 보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17,18절을 보면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주께서 자신의 곁에 계시며 자신을 강건케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을 강건케 하신 것은 바울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주님은 자기 백성을 세워서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일하시고 붙드시고 강건케 하시는 분이시지 우리 개인의 복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강건하게 하심으로써 전도의 말씀만 온전히 전파되게 일하십니다. 또한 우리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지시면서 그리스도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일하심에 우리가 원하는 다른 일을 첨가해서는 안됩니다.



병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 주는 예수님으로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꿈꾸고 원하는 예수일 뿐,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오신 메시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아닌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도 바울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때에 바울의 곁에 있던 사람은 누가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고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지만, 그것 때문에 바울이 자신의 교회 하나를 크게 만들었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을 버리고 바울을 떠나는 현상만 있을 뿐인데 사람들은 예수로 인해서 교회에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만을 꿈꿉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이 가신 길에 관심이 없고, 사도 바울을 얘기하면서도 사도가 갔던 길에는 관심이 없는 것을 과연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모든 관심은 주님이 행하신 은혜의 일에 두게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신 길이 우리에게 어떤 고난으로 다가온다고 해도 마다하지 않고 순종하고자 하는 헌신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사도가 이 믿음에 붙들려 인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믿음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뭔가 다른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다른 인생을 살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자신의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말씀이 전파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 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교회 안에서 몸의 관계를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나의 편함보다도 지체의 아픔과 힘듦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헌신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증거하는 길로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사도가 죽음을 앞둔 마지막까지 생각한 것은 그리스도며 천국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도에게는 삶의 방향과 중심이 분명하고 뚜렷했기 때문에 어떤 고난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굳건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도 사도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이 천국을 향해 있다면 자연히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삶의 방향을 선명하게 세우고 사도가 갔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