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강) 디모데후서 4:19-22  형제의 문안

 

<본문>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드로비모는 병 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노니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디모데후서 4:19-22)



<설교>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어떤 사람은 싫어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으로 기억에 남는 것일까요?



사람이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교회에서든 교회 밖에서든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어떤 관계로든 사람을 만나고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과는 부딪히지 않고 살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사람은 내 마음대로, 내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골라가며 관계를 맺고 교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참으로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자제력으로는 미워하는 감정을 좋아하는 감정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워하는 사람은 미운 마음 그대로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운 마음을 간직한 채 안 그런 척 한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그것은 위선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신자의 모임을 교회,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체라고 부르며 형제라고 말합니다. 형제는 참으로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계속되는 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교회를 ‘형제’의 관계로 말할 때 우리의 감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즉 ‘너는 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저 형제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든 상관없이 성경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로 일컫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된 우리는 나의 감정을 가지고 형제를 대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성경이 말하는 형제의 관계에 순종해야할 의무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나의 감정이 다스려져야 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여러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지막 편지는 디모데후서입니다.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부분이기 때문에게 사도에게는 본문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을 몇 사람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끝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그리고 오네시보로 집에 문안하라고 합니다. 또한 에사드로와 드로비모라는 사람의 행적을 언급하고,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라는 사람의 이름도 언급을 합니다. 이들은 모두 바울에게 기억된 사람들입니다.



물론 바울이 기억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신앙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말한 것처럼 세상을 사랑해서 데살로니가로 간 데마라는 사람도 바울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에게 해를 입힌 나폴레옹이란 이름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도 바울은 그들을 개인적인 감정으로 기억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에게 해를 입혔다는 것 때문에 나쁜 사람으로 기억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15-18절을 보면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 당시에 바울에 대한 경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입장이라면 분명 그들에 대해 좋은 감정이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나를 적대시하는 사람인데 좋은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기준으로 그들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복음을 기준으로만 바라봅니다. 때문에 어떤 마음으로 하던 결국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 아니냐며 바울은 다만 그것으로 기뻐하겠다고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면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저주하는 말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핍박하는 누구라 할지라도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한 연약한 자로만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신앙이 있는 자로서의 너그러움을 보였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말한 것처럼, 바울은 자신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한 연약한 자로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것이 자신임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과 같이 연약한 자들에게도 예수님의 긍휼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을 핍박했던 사람들도 형제로 일컫게 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이름을 부르며 문안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바울에게 친분이 있거나 평소 바울에게 잘해줬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개인적 관계가 아니라 자신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을 문안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며 문안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분명 기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께 기억된 자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가 이름을 부른다면 그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는 증거입니다. 신자는 이것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눅 10:20절을 보면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또한 계 20:15절에서는 “누구든지 생명책이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고마움을 가슴에 안고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슴에 안고 사는 사람이라면, 은혜를 안고 있는 그 마음으로 형제들을 대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한 자로 바라보게 되고, 항상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내고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이며 형제 사랑입니다.



설령 누군가의 나쁜 점만 보여서  불쌍한 마음이 도무지 들지 않을 때에도 최소한 나에게서 그들과 같거나 비슷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나라고 해서 그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깨우침이 있을 때에 문제를 자신으로부터 시작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깨달음이 있게 하기 위해서, 즉 진실한 신자의 성숙과 유익을 위해서 교회 안에도 일부러 가시를 심어 놓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내가 누구를 미워하고 싫어한다고 해도 그들이나 나나 도토리 키 재기로 다 같이 불완전하며 연약한 존재라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형제의 관계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와 형제의 관계에 있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실체를 그대로 내어 놓고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의 인도와 간섭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무조건 그들을 용서할 마음을 달라거나 그들이 변화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이런 일들을 통해서 나에게 영적인 유익과 깨우침을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형제를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끝까지 분쟁만 일삼고 도저히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큰 문제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당장 그들과 맞서 싸우겠다는 결심보다 우선에 교회 안에는 알곡과 죽정이가 반드시 함께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부터 하셔야 합니다.



말하자면 복음을 아예 모르는 자가 교회 안에 들어 온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입니까? 그들도 전도가 필요하며 복음이 필요한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밖에서는 전도하러 교도소까지 찾아가고 사랑으로 대한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는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외면하려고 한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세상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오직 생명의 문제로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기억하는 데는 ‘나’가 기준이 되면 안됩니다. 다만 다함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한 연약한 자로서 예수님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관계로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나 또한 연약한 자임을 날마다 되새기면서, 이런 나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를 생각하시고 다함께 그 기쁨을 누릴 자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