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요한삼서 1:1-2 영혼이 잘됨같이

<본문>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삼서 1:1-2)

<설교>

요한이서는 미혹하는 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경고의 내용이라면 요한삼서는 디오드레베란 사람을 언급하며 참된 성도와 진리를 전하는 사도들을 거부하는 것을 본받지 말 것을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사도가 왜 이런 경고를 교회에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사도의 관심이 신자가 참된 구원의 길을 바르게 가는 것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는 신자를 다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시각에서만 바라볼 뿐입니다.

사도는 자신을 세상에 남겨 놓으신 예수님의 참 뜻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셨던 택한 백성을 부르시는 일을 사도들을 세워서 계속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사도가 잘 알았기에 사도의 관심이 오직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진리 가운데서 바르게 나아가는 것에 있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면 사도의 마음을 알 것이고, 사도의 마음을 안다면 지체에 대해 무엇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자로 지체가 서로 만난다면 서로에 대해 무엇에 관심을 두겠습니까? 그가 지니고 있는 돈이겠습니까? 아니면 그의 세상의 지위겠습니까? 아니면 저 사람이 출석하면 내 교회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라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세상이 지닌 마음일 뿐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지체를 바라보게 된다면 결국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요한일서에서 무엇이 사랑인가를 수없이 들었습니다. 나의 마음을 맞춰주고 나를 기분 좋게 해주고 친절히 대해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형제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형제에게서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뭐겠습니까? 형제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를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에게 은혜와 사랑이 있기에 자연히 낮아진 자리에서 형제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구원의 길이 되는 진리에서 머물러 살아가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로 되어 있는 사도의 마음이 요한삼서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전하는 사도를 접대하지 않고 거부하는 디오드레베란 사람에 대해 경고하면서 그를 본받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접대하지 않은 것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전하는 사도를 접대하지 않는 것은 곧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의 서신들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라는 한 개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도를 세워서 말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단순히 예배 시간에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지금 나에게 이 말씀을 하신다는 생각이 살아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가이오를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고 일컫습니다. 이것은 가이오를 향한 사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짐작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와 가이오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진리로 인한 관계였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진리가 신자를 사랑의 관계로 한 몸으로 불러 모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에서 관심이 멀어진 채 함께 하는 것은 참된 신자의 관계라고 볼 수 없습니다. 진리가 두지 않은 단지 육체의 만남이고 관계일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지체를 만날 때 그를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시고 그를 위해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음을 생각하고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진리 안에서 형제라는 관계는 오직 사랑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일 뿐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라면 그가 항상 잘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사도도 가이오의 잘됨을 위해 간구합니다. 2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이 구절에 가이오에 대한 사도의 마음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가 간구하는 잘됨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친한 사람에게 ‘잘되라’고 말한다면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마 거의 모두가 하는 일, 즉 세상에서의 잘됨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가 간구하는 잘 됨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2절의 내용을 보면 마치 사도가 가이오의 영혼이 잘되고, 세상의 모든 일도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즉 영혼과, 세상의 형통, 건강, 이 세가지의 잘됨을 두고 간구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목사는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여 소위 ‘삼박자 구원’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영혼과 세상 일 건강, 이 세가지가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가지만 잘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죽어서는 천국가고, 살아서는 땅에서 성공하고 죽을 때까지 육신도 건강하다면 그야말로 모든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사도는 가이오에게 삼박자 축복을 간구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라고 말합니다. 영혼이 잘된 것처럼 범사에 잘되기를 간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범사에’는 ‘모든 일에 있어서’라는 뜻이 됩니다. 즉 ‘모든 일이’가 아니라 ‘모든 일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같은 의미 같지만 사실은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일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모든 일이 잘되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라는 말은 ‘어떠한 일에서든’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모든 일이 잘되기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에서든 잘되기를 간구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가이오의 믿음이 어떤 일에서든 잘되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잘됨 같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잘됨과 범사에 잘됨은 같은 의미의 잘됨입니다. 그리고 뒤에 등장하는 강건 역시 육신의 건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잘됨과 같은 의미에서 강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범사에 잘되는 것, 강건한 것 이 모두는 영혼의 잘됨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영생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보다 잘됨은 없습니다. 그러면 범사에 잘되는 것 강건도 영혼의 잘됨, 즉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아 영생에 있게 되는 것과 연관하여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그가 살아가는 모든 일을 두고 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육신의 일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삶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그리스도를 의미하게 하고 천국을 소망하게 할 때 얼마든지 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안다면 형제에 대해 이러한 잘됨을 간구하게 될 것이고 이것이 형제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교제하고 나누는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에서의 잘됨만을 소망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강건한 영혼으로 사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로 사는 것뿐입니다. 신자의 잘됨의 의미는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있음을 기억하시고 그리스도로 행복감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