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요한삼서 1:3-8 가이오의 사랑

<본문>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저희가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거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저희를 전송하면 가하리로다 이는 저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이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요한삼서 3-8)

<설교>

지난 수요일 말씀대로 성경은 신자의 잘됨의 의미를 영혼에 두고 있습니다. 즉 영혼의 잘됨을 잘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불행이고 고생이지만 그 일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하고 의지하고 천국을 소망하게 하는 유익이 되어졌다면 신자에게는 잘된 일이요 하나님의 선하신 일이라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삶을 두고 세상은 바른 평가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잘됨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으로부터의 평가에 마음을 둔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며 어리석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장로는 가이오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을 말합니다. “형제들아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3,4절)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장로에게 기쁨은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가이오의 진리 안에서 행하는 모습은 무엇이었습니까? 5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한 것이 가이오가 진리 안에 행한다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나그네에게 행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을 영접하고 환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진리 안에 행하는 것은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철저히 하고 부지런히 성경을 보고 우상을 섬기지 않는 것 등으로 연상이 될 수 있는데, 장로는 다만 나그네에게 행한 것을 두고 진리 안에 행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음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가이오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는 나그네를 영접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나그네를 영접하는 그 마음이야 말로 그가 진심으로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그네’로 일컬음 받을 수 있는 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말할 때 집이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게 되면 진리에 행하는 것을 결국 걸인들을 영접하고 환대하는 문제로 오해하게 될 것입니다.

마 25:40절에 보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자는 가난한 사람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자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복음 증거하는 자로 보내실 때 큰 자가 아니라 지극히 작은 모습으로 보내셨습니다. 마 10:10절에서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이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고 말씀한 것처럼 제자들은 얻어먹는 자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왜 제자들을 이런 모습으로 보내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시각과 하늘의 시각을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얻어먹는 자들을 영접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귀히 여긴다는 증거가 됩니다. 즉 복음에서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크고 귀한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귀한 내용을 보게 되었으니 복음을 전하는 자를 귀히 영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가이오가 나그네를 영접하는 것에도 이런 마음이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불쌍해서 대접하는 차원이 아니란 것입니다. 불쌍해서 대접하는 것이라면 불쌍한 자를 도와주는 모든 것을 진리에 행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즉 불신자가 불쌍한 자를 도와주는 것까지 진리에 행하는 것으로 봐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나그네의 모습이 증거하는 것은 신자는 이 세상에 머물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잠시 머물다가 우리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는 나그네입니다. 그러므로 나그네는 나그네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영접하고 환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그네를 영접한 가이오의 마음에서 세상이 아닌 하늘나라를 본향으로 바라보고 살아가는 믿음을 보게 되는 것이고 이것을 두고 ‘진리 가운데 행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소원에 빠져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세상의 것을 복이라는 명목으로 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작은 자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이미 하늘의 것이 크고 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이 크고 귀한 것으로 그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지극히 작은 자를 영접하지 못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가 증거하고 있는 하늘의 귀한 것을 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나그네는 누구일까요? 그들은 세상을 소망하기보다는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신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돌아갈 본향임을 알고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소망하며 사는 그들이 진정한 나그네입니다. 집 없는 가난한 자가 나그네가 아니란 것입니다.

이러한 나그네를 귀히 여긴다면 그것은 그 역시 세상을 떠나 본향에 거할 그 나라를 소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진리 안에 있는 자로 만난다면 진리의 귀함을 아는 신자로서 사로를 영접할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자라 진리를 가진 형제를 만났는데 자기 자랑이나 경쟁이나 시기가 보여지겠습니까? 진리만을 보고 형제를 대할 뿐, 사람을 보고 사람에 따라 대하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신자는 걸인이든 노숙자든 그들을 육체대로 보지 않기에 불쌍하다는 마음으로 돕지 않습니다. 다만 나나 그들이나 예수님이 아니면 멸망의 자식일 뿐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쌍한 존재는 돈이 없는 그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아니면 멸망에서 헤어날 수 없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다만 불쌍한 존재가 은총을 입어서 진리에 거하는 복된 존재가 되었기에 그것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진리 안에서 사람을 보는 것이고 그것이 참된 영접인 것입니다. 신자가 이런 마음으로 만난다면 이것이야 말로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사랑의 관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서로를 영접하는 것이고 지극히 작은 자 나그네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