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요한삼서 1:9-10 디오드레베

<본문>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쫓는도다(요한삼서 9-10)

<설교>

사도는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심히 기뻐하였습니다. 진리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는 사도에게 형제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5절을 보면 사도는 가이오가 나그네된 자들에게 행한 것을 신실한 일로 말하고 있습니다. 가이오의 사랑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은 나그네된 자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나그네된 자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행함 외의 것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까?

우리는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에 대해 한가지 오해를 갖기 쉽습니다. 그것은 ‘행한다’는 용어로 인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어떤 행함, 실천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한다면 진리 안에서의 행함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행위들을 따로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행위에 대한 이러한 구별이 기도나 봉사 등의 행위에 대해서는 가치 있는 것으로, 그리고 단지 일상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차별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행함, 즉 실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행함으로 나타나기는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행함이 담고 있는 진리에 있는 것입니다. 즉 행함은 진리 안에 있기에 자연히 맺어지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임을 알고 진리의 정신을 알기에 그로 인해 보여지는 행함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두고 진리 안에 행한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령 가이오가 나그네된 자들에게 행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는 신실한 일로 사랑을 증거한 것으로 말합니다. 이것이 단순히 나그네된 자들을 돕고 영접한 행위를 두고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도는 나그네된 자들에게 행하는 가이오의 그 마음을 본 것입니다.

나그네는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나그네로 사는 것을 귀히 볼 사람은 함께 천국을 소망하는 신자, 즉 형제 외에는 없습니다. 결국 가이오가 나그네된 자에게 행한 것은 단지 불쌍한 사람을 도와준 차원이 아니라 천국을 소망하는 형제로서 행한 것이고, 때문에 나그네된 자에게 행한 가이오의 일은 그 속에 진리가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것을, 몇 가지의 행위로 구분 지을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속에 진리가 있다면 주어진 상황과 형편에 따라 진리에 걸맞은 행함이 맺어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본문에 ‘디오드레베’란 사람은 진리에 맞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9절을 보면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합니다.

디오드레베란 사람이 등장하는데 사도는 그를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사도를 접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10절에서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도를 접대하지도, 접대하는 사람을 교회에서 내어 쫓는 횡포를 부렸던 것입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불안케 하는 것은 자신보다 더 인기 있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불멸의 이순신’이란 드라마에 보면 전쟁에서 계속 승리하는 이순신의 인기가 높아지자 왕이 극도로 불안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순신으로 인해 국가가 위기에서 극복되는 것을 보지 않고 흔들리는 자신의 위치로 인해 불안해하는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보편적인 반응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본다면 디오드레베도 사도들로 인해 자신의 위치에 불안감을 가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접대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를 접대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복음을 외면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를 접대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디오드레베에게 중요한 것은 복음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을 접대하지 아니한 디오드레베의 행위는 분명 진리 가운데 행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대로 사도를 접대하지 않는 것이나, 사도를 접대한 사람을 내어 쫓는 행위는 그의 중심에 진리가 없음을 분명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를 접대하고 안하고의 문제는 ‘접대하라’는 명령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 진리가 있다면 자연히 복음을 전하는 사도를 환영하고 접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신자는 진리에 의해 진리가 원하는 바를 따라 자연히 움직이는 것이지 누군가의 ‘하라’는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 가운데 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교인들에게 ‘무엇을 하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무엇이며 진리가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가에 대해 쉬지 않고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진리가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지 않고 자신의 본성을 따라 살아간다면, 그것은 진리에 복종치 않은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자가 진리 가운데 행한다면 으뜸 되고자 하는 마음이 교만임을 분명 알게 됩니다. 진리는 우리를 그리스도 앞에서 철저히 무너뜨립니다. 으뜸 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나 자신임을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나의 본질, 속의 실체를 낱낱이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가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데, 과연 그러한 신자가 으뜸 되고자 하겠습니까?

요한복음 3:30절을 보면 세례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은 오직 예수님이 높임 받는 것에만 모든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요한의 마음이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과의 관계에 바로 서 있는 신자의 마음과 일치되어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기에 신분적 차원에서 높인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알았을 때 예수님은 높임 받을 수밖에 없는 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아는 신자의 마음이기에 이러한 신자에게서 으뜸 되고자 하는 것은 자연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으뜸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일 뿐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볼 때는 차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령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에 따라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더 나아보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의 활동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은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더 나은 위치에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구원을 얻은 한편 강도를 비교하면 당연 사도 바울이 더 나아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자신을 한편 강도보다 나은 자로 여길까요? 만약 바울에게 그런 시각이 있다면 바울은 자신이 한 일을 기준 삼아 다른 사도들과 비교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일을 자기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주 안에서 된 것으로 여길 뿐이었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낮은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신자라고 해서 불신자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라고 해서 하나님께 차별적 대우를 받는 것도 없습니다. 다만 구별된 존재로서 심판에서 건짐 받는 은총을 누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인간도 으뜸이 될 자격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가운데 행하는 신자라면 자연 으뜸 되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질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린 서로 지체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복종할 대상은 오직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일 뿐이며 지체인 신자는 몸을 위해 서로 함께 하고 돕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으뜸 되고자 한다면 그는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에서 벗어나 있다고 봐야 합니다. 나를 다스리시는 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다스릴 자를 바라보는 것은 예수께 관심이 없는 자에게서 보여지는 모습일 뿐입니다.

멸망의 자식이며 죄인인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고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고 거룩한 피로 말미암아 악한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는 이 기쁜 소식이 말 그대로 여러분의 심령에서 기쁨으로 넘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천국을 소망하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나그네 된 형제를 대할 때 그를 진심으로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누구 하나 으뜸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영접하고 섬기기를 즐겨하는 낮은 자만 있게 될 것입니다. 디오드레베가 없는 교회로 남는 것,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복음의 능력 아래 있는 모습으로 증거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