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히브리서 1:1-3 그리스도의 위대함

<본문>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1-3)

<설교>

현 사회에서 믿음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믿음 있는 자를 세상은 인정치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이 인정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힘이 되지 못하는 믿음이기에 과연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를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교회와 세상이라는 각기 다른 문을 왕래 하면서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믿음 있는 것이 인정을 받고 높임을 받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믿음이 있는 자로 행세하려고 하지만, 세상에서는 전혀 알아주지 않고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 믿음이기에, 때로는 오히려 배척을 받고 조롱을 받는 것이 믿음이기에 고의적으로 믿음을 감추거나 아니면 세상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믿음의 문제를 잊어버린 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러한 구분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든 세상에서든 믿음은 믿음의 모습 그대로를 증거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믿음이 있는 자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사는 것이 곧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신자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고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던, 힘이 되던 힘이 되지 못하든 그것에 상관하지 말고 묵묵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주변 분위기에 민감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 우리가 분위기든 사람이든 신경 쓰지 않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말씀을 통해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믿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1-2절에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내용은 예수님이 만유의 중심에 계시고 구약의 모든 것까지도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씀한다는 것은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계시는 완벽하게 주어졌기에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 우리의 모든 관심을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등장을 시킨다거나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이단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으시다면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자기 경험 안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제멋대로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을 통해서 배워야 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도자시며 빛이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에게 인도하실 유일한 분이시며 어둠에 있는 우리에게 빛을 주실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 분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인데 그러한 분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앞서 말한 대로 자기 경험에서 자신이 만들어 낸 하나님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병들었다가 기도해서 나은 사람이라면 그러한 자기 경험에서 하나님은 병든 자를 고쳐주시는 분으로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러한 그에게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말은 단지 성경에 있는 내용으로 여겨버릴 뿐 관심은 다른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가 아무리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산다 할지라도 병든 몸 하나 고침 받지 못한다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여겨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구약에 여러 부분들, 즉 기적과 제사와 절기 등의 모든 것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이 지금 마지막 날에는 아들로써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보면 구약의 기적과 제사와 절기 등의 모든 것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계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계시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예표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치 구약의 절기나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양 이해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구약에는 여러 부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셨고, 신약에서는 아들로써 계시하셨다면 구약의 여러 부분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의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여러 부분들과 모양이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히브리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구약의 여러 부분과 모양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지금에서도 구약의 여러 부분들과 모양 자체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히브리서에 반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기를 싫어하는 것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본질을 예수님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함에 두려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2절 마지막에 보면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말씀하고 3절에서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외에 그 무엇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성경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지 자신의 노력과 행위로써 영광을 돌려보겠다는 것은 헛된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또한 3절에 보면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라고 말합니다. 모든 만물들이 예수님의 능력의 말씀에 붙들려 있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놀라운 말씀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능력과 힘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힘으로 되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예수님의 능력의 말씀에 의해 되어지는 것뿐인데 어떻게 인간을 독려하고 힘을 내게 해서 뜻하는 일을 이루어 보겠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은 예수님께 붙들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되어지든 되어지지 않던 그것은 주님이 하신 일이며 주님의 뜻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되어지면 되어진 일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고 실패한 일이면 실패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즉 어떤 상황에서든 주님을 의지하고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가장 신자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위대하시고 세상의 중심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있어야 할 믿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세상은 알지도 보지도 못합니다. 자연히 믿음의 위대함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한 세상으로부터 믿음이 대우 받기를 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또한 돈과 권력을 힘으로 여기는 세상에서 믿음 역시 힘으로 여겨지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헛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믿음을 조롱하는 것으로 세상은 이미 심판의 대상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보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로써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습니다. 만물은 그분의 능력의 말씀에 붙들려 있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 분을 우리가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놀라운 일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긴다면 그야 말로 나약한 신자로 전락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불만을 감추지를 못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믿음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믿음이 전혀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결국 관심이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쏠려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위대하신 분으로 말합니다.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그분을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나약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기보다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문제, 내세의 문제에 염두를 두지 않기 때문에 불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십시오. 만물을 붙드시는 그분이 우리를 붙드시고 계십니다. 나약해질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을 보지 말고 내세를 보십시오. 그럴 때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으로 충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