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강) 히브리서 3:7-14 견고히 잡을 것

<본문>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브리서 3:7-14)

<설교>

믿는 자에게 고난과 어려움이 있게 될 때 보편적으로 뭔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난과 어려움은 고통스러운 것이고, 고통스러운 것을 하나님이 주신다면 그것은 죄에 대한 징계의 차원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7-8절을 보면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의 광야 생활은 고난과 고통의 세월이었습니다. 40년의 세월을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지낸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힘든 것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드러내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오면서 편안하고 멋있는 삶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치시고 그들을 이끌어 내신 여정이고,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가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의 삶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가로 막은 것은 홍해였고, 홍해를 건너자 마실 물도 없고 먹을 음식도 없는 광야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40년의 광야 생활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낱낱이 드러내는 세월이었습니다. 편안하면 얼마든지 감춰졌을 것들이 고난과 어려움으로 인해 폭로가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마실 물의 문제, 애굽에서 먹었던 부추 등의 음식 문제, 고기가 먹고 싶다는 등 한마디로 말해서 음식에 대해 불평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여러분께는 ‘겨우 그런 것으로’라는 생각으로 다가올지 모릅니다. 좀 더 심각하고 큰 문제로 원망을 했다면 모르겠는데 마실 물이나 부추 등이 먹고 싶다는 것으로 원망을 했다는 것이 우습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물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단지 목이 조금 말라 물을 마시고 싶다는 상태가 아닙니다. 사막에서는 물이 곧 생명인 것처럼 광야를 걸어야 하는 그들에게는 물은 곧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물이 없으면 당장 죽어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물로 인해 원망한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돈이 없어서 원망하는 것보다 더 절박한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도 그들의 원망과 불평은 정당화 될 수 없고 이해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잘한 것이 전혀 없는 이스라엘을 보존하시고 약속하신 땅까지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생활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이스라엘의 원망과 불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고 그들을 붙드시고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죄를 범했을 때 대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죄를 범했으니까 죄에 대해 하나님이 벌을 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무조건 하나님의 사랑을 앞세워서 모든 죄를 다 덮어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당화를 꾀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라는 것은 ‘이처럼 불의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서 떠나지 아니하시고 여전히 나를 붙들어 인도하심’을 생각하며 크고 위대하신 사랑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하심 덕분에 존재하고 있음을 가슴 속 깊이 깨닫는다면 그는 자신이 받고 누리고 있는 사랑으로 성도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그에게서 나올 것은 ‘형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우리의 죄에 대해 무조건 덮어 버리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자식이 나쁜 짓을 했을 때 부모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나쁜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덮어버리고 전혀 나무라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까? 남의 자식이라면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자식이라면 나쁜 길로 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옳은 길로 가도록 하기 위해 매를 들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보다 더한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이 죄를 범한 것을 가만히 보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징계를 하시면서 진리의 바른 길로 가도록 일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했을 때 징계를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랑을 안다면 고난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이고 징계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은 신자의 고난과 어려움과 징계의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이 주시는 복을 편한 함에서 찾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안다면 부모로부터 매를 맞으면서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잘못된 행동으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에 대해 죄스럽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철이 든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신자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려면 신앙에 철이 들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0-1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너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나”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 중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한 것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입니까? 그렇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까?

원망한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은 ‘너희도 이같이 하면 벌받는다’는 엄포를 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믿는 자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2-1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이는 믿는 자중 혹시 고난과 어려움으로 인해 이스라엘처럼 원망과 불평으로 인해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해서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동원하여 그들 마음을 일깨워주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매일 서로 권면하여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되는 것을 면하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는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신자된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변함이 없고 포기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사랑할만한 대상을 사랑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이 사랑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은 확실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사랑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사랑할 자로 택하셨기 때문에 부어지는 사랑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의지이며 열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을 포기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39절에서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는 말로서 사랑이 얼마나 강하고 확실한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견고히 잡을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확증된 사랑입니다. 우리의 실수와 허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놓지를 못합니다. 신자란 이런 사랑에 붙들려 있는 존재인데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사랑을 의심한다면 아직 신앙의 깊이가 얕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신자들의 삶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확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잊지 않게 하시고 그것을 견고히 붙잡는 신자로 굳게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하늘의 귀한 복으로 채우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 때문에 인생이 고달픈 것입니다. 하늘의 복으로 채우시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냥 내버려두시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복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해 때로는 징계하시고 어렵게 하시고 고통이 있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면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이스라엘처럼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고달픈 인생은 많은 유익을 가지고 다가올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인생에서 십자가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만 견고히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럴때 여러분의 삶에 감사와 은혜가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