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강) 히브리서 4:4-11 안식

<본문>

제 칠 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브리서 4:4-11)

<설교>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포기되지 않고 그대로 성취되어질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신자는 말씀이 약속하고 있는 장차 성취되어질 것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옳습니다. 이러한 삶이라면 현재의 자기 사정과 입장을 앞세우지 않게 됩니다. 지금의 내 사정과 입장이 나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나의 모든 미래가 담겨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말씀에 의해서 애굽에서 나오게 되었고 말씀에 의해 가나안으로 인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길을 그 누구도 막거나 포기시킬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이 그들을 붙들어 인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어떤 사정과 형편에서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막을 세력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고, 세상은 심판으로 멸망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은 이 말씀 그대로 되어질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이 아니라 말씀이 진정한 현실로서 세상을 덮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지금 우리의 사정과 형편이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중요하고 비중있는 것일까요? 신자란 내 사정과 입장 형편을 따라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소리를 내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풍선에 물을 넣고 흔들면 물이 들어 있기에 물이 내는 출렁 출렁 소리가 나게 됩니다. 우리에게 말씀이 있고 그리스도가 있다면 말씀이 내는 소리, 그리스도의 소리가 나에게서 나와지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말씀을 속에 두고 그리스도를 속 깊이 두고 살아가는 신자인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제 칠 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안식에 들어가셨으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화합지 않은 자들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며 감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감상용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따라가야 할 길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에 들어가신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말씀을 주시면서 그 말씀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말씀에 순종치 않음으로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제 칠 일이란 말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배경으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육일동안 세상을 만드시고 칠일에 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음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안식은 말씀의 성취와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를 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말씀을 듣고 믿음을 화합지 않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듣고 흘려버릴 성질의 것이 아니라 수용하느냐 수용하지 않느냐라는 중요한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7-8절을 보면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다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는 말을 합니다.

여호수아 때의 안식은 가나안 정복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 때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안식의 성취를 의미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안식이 성취되었다고 말한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안식은 어떤 의미로 남게 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에게 성취된 안식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안식을 향해 나아가는 입장은 되지를 못할 것이고,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가 있다는 말씀 역시 우리와 연관이 없게 될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안식이 여호수아 때에 이미 성취되었다면 지금의 우리에게 안식에 대한 말씀이 주어질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때 이미 성취된 안식이라면 다른 날에 대해 더 이상 말씀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취된 그것으로 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라는 말을 하는 것은 여호수아 때의 안식에 대한 말씀과 다른 새로운 말씀이 주어진 오늘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말씀은 여호수아 때에 성취된 것이 아니라 다윗 때에도 계속 새로운 말씀으로 존재하셨고, 지금 우리들에게도 외쳐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을 향해 나아가던 이스라엘이 오늘날 안식을 향해 나아가는 신자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그 모습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다면 우리 역시 그들과 같은 운명이 되어질 것임을 경계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무엇에서 실패하였는가를 말씀함으로써 그들과 같은 실패의 길을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1절의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는 말씀으로 확실해집니다.

지금의 우리는 안식할 때가 남아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식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는 것만 생각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을 향하여 나아가는 신자로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 아래 있습니다. 약속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참으로 든든한 삶이 곧 신자의 삶입니다. 그런데 정작 약속 아래 있는 우리는 든든한 삶이 되지를 못합니다. 항상 세상을 바라보면서 세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뒤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세상 것이 없는 것으로 불평하면서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들이 크게 부러워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실체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세상에서 불려 나와서 안식을 향해 가는 신자에게 이스라엘의 얘기를 하면서 지금의 삶을 살필 것을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사정과 형편과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입니다. 우리의 입장과 사정에 따라 약속이 변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때문에 어떤 형편에서도 우리의 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은 우리가 힘을 써야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실패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며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신자란 안식의 약속이 주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안식이라는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것은 과거 안식에 들어가기를 실패한 이스라엘처럼 너희도 실패하면 지옥 간다는 엄포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확고한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붙들고 살아가라는 권면을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그들이 포기하지 말아야 할 확고한 것을 붙들고 바라보는 일에 실패했으나 너희는 그러지를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확고한 것을 붙들고 살라는 것이고, 이것이 곧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힘쓰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관심과 정신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를 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편안한 삶보다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이 문제를 더 크고 중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를 향해 가는 존재인가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편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해도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이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안식을 바라보고 사는 신자에게 예수님의 오심보다 중대한 것은 없습니다. 이 중대한 것을 세상 때문에 소홀히 여기지 않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안식에 미치지 못한 자가 있었다는 말을 다시 상기하면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