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강) 히브리서 4:12-13 말씀의 능력

<본문>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브리서 4:12-13)

<설교>

성경을 이해할 때 주의할 것은 앞뒤의 내용은 무시한 채 내 귀에 들어는 몇 구절에 치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의미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지금 어떤 내용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염두를 두어야 합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몇 구절에 대한 해석으로 치우치게 되면 비록 말은 맞게 한다 해도 그 말씀에 담겨 있는 저자의 깊은 뜻은 놓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을 전문으로 연구하고 설교하는 목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지만 여러분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힘쓰는 신자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이 제가 드린 말씀을 기억하고 생각해야 할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많이 들었고 잘 아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는 이 구절은 누가 봐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는 죄를 파헤치고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런 의미의 말씀인 것은 맞지만 다시 생각해야 할 부분은 지금껏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실패를 말하면서 그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말하던 저자가 갑자기 말씀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파헤친다는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저자는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14절에서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여 예수님을 믿는 도리로 말하고 그분을 굳게 붙잡으라고 권면하는 것을 보면 단순히 말씀이 우리에게 하는 일을 가르치기보다는 왜 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의 도리로 삼아야 하고 그분을 굳게 붙들어야 하는가를 가르치기 위한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이스라엘의 실패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떡의 문제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물이 없을 때 물만 있으면 자기들의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여겼습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먹을 것만 있으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즉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 환경이 문제지 자신들은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환경만 좋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사느라고 바빠서 교회를 등한시 할 때 ‘나도 돈이 많으면 이렇게 바쁘게 살지 않아도 될 것이고, 그러면 나도 하나님을 더 열심히 섬길 수 있을 것이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까? 이것은 자기 믿음의 문제의 원인은 환경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제공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고기를 원할 때 고기를 주시고 만나를 내려 주셔서 광야에 있는 동안 먹을 것에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들어 주십니다. 과연 이스라엘이 그러한 환경에서 신앙으로 살았습니까? 그들은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없는 환경에서도 가나안을 바라보고 그들을 두려워하여 들어가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결국 이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좋은 환경이 신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행복의 조건을 세상에서 찾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으로 끊임없이 세상의 것을 기대합니다. 이것이 떡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고생하게 하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떡은 없어도 된다는 것입니까?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분명 떡이 필요합니다. 떡 없이 성경만 들여다본다고 해서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회사를 다니고 장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니요? 그러면 회사도 장사도 모두 그만두라는 것입니까?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떡이 나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떡이 있어야 살지만 떡이 나를 책임지지 않는 것, 이것을 아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떡이 나를 책임진다는 사고방식에 머물러 살아갑니다.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이 말씀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심각한 문제를 모르기 때문에, 단지 육신의 문제만 생각하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땅의 것을 구하고, 땅의 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하소연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심각한 문제를 파헤치고 깨닫게 하기 위해 말씀이 있음을 본문이 말하는 것입니다.

즉 본문의 의미는 단순히 말씀을 들었을 때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된다는 강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인해 내 자신의 심각한 문제점을 발견할 때 비로소 떡이 중요한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함을 알게 된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14절에서 예수를 굳게 붙잡아라는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떡을 원하는 것은 떡이 있어야 내가 살 수 있고, 떡이 있어야 지금의 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떡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 문제는 떡으로만 해결된다는 방식이 곧 떡으로 사는 것입니다.

떡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필요에 따라, 우리에게 유익된 대로 공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가난하면 가난한 환경에서 배우게 하실 것이 있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가난을 벗어나는 것만을 생각하게 되고, 결국 그것을 위해 떡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떡으로 사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에게 가난은 힘든 것이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더 큰 고통이 있고 더 힘든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 문제입니다. 가난한 것이 비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멸망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 비참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환경만 보이게 되고, 결국 남들처럼 살지 못하는 자신이 비참하게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참함을 해결하는 길은 돈을 버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떡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이 떡으로 사느냐 말씀으로 사느냐는 것은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말씀이 이해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알게 한다는 것보다는 인간의 비참을 말씀이 보게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심판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문제를 말씀을 통해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영혼에 문제가 없고 육신의 문제만 가지고 산다면 모든 것은 떡으로만 해결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영혼의 문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아무리 많은 떡을 가지고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떡으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는 것은, 눈앞의 환경만을 바라보는 무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인간의 문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으되 예수님을 붙들지를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굳게 붙들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문제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살 길임을 알았기에 예수를 붙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붙들고자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떡을 주는 분으로만 여깁니다. 예수님이 곧 생명의 떡임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는 말씀의 의미를 묵상해 보십시오.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뜻까지 감찰해서 하나님 앞에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잘난 자가 아니고 벌거벗은 자로 드러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든 수치와 악함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심각한 문제를 들여다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벌거벗은 수치를 알게 하는 것이야 말로 말씀만이 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이것을 위해 말씀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말씀이 파헤치는 여러분의 악함과 더러움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떡도 인간의 문제와 비참한 상태를 고칠 수도 해결하지 못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이 우리의 모든 무제를 해결하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자연히 떡이 아니라 말씀을 선택한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이것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