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14-16)
<설교>
힘없는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하는 방법 중 하나가 힘있는 자를 붙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흔히 ‘줄을 선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줄이 끊어지지 않는 단단한 줄인가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도 필요하고 힘있는 자의 눈에 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처세술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힘없이는 살기가 매우 힘든 것이 세상의 구조이기 때문에 힘이 없으면 힘있는 자를 등에 업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붙들고 사십니까? 여러분이 서기 위해 애 쓰는 줄은 무엇입니까? 혹 세상에서 우리의 육신을 지탱하는데 도움이 되어줄만한 힘을 찾으며 그 힘을 붙들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닙니까?
세상이 힘있는 자가 활개치고, 힘있는 자가 중심이 되어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판단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힘과, 보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계시는 세상을 볼 수 있어야 그것이 진짜 본 것입니다. 이처럼 진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표면적인 것만을 보면서 거기에 매여 산다면 믿음으로 사는 삶은 이미 물 건너 간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니라”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을 승천하신 자라고 말합니다. 왜 승천하신 자라는 표현을 쓸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시작해서 세상에 오심, 고난, 십자가의 죽으심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승천하신 자라는 말을 하는 것은 어떤 의미겠습니까?
승천 다음에 있을 것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세상의 멸망, 곧 심판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과 어려움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님을 붙들기를 원하면서 왜 예수님을 붙들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심판의 시각에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리석음은 자신들의 발 아래 놓여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심판을 보지 못하기에 세상의 마지막을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또한 마지막을 보지 못하기에 항상 현재를 보게 되고 현재에 매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즉 멸망이 세상의 현실이며 실체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길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지금은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지만 심판의 때가 되면 모든 것은 사라질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만 벗어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자리에서 본다면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그분을 견고히 붙잡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굳게 잡는 것을 우리가 힘써야 할 문제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굳게 붙잡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나아가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행하는 것으로 예수님을 붙들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굳게 잡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항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으로만 내가 살 수 있음을 아는 것,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굳게 잡는 것은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이 나에게 전부입니다.’라는 고백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평안할 때는 쉽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삶에서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삶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평안입니다. 어떻게 하면 힘든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가 관심의 초점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예수님을 굳게 잡으므로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누구나 예수님을 잡겠다고 하겠지만, 예수님을 잡는다고 해서 환경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굳게 잡는 삶에 대해 누가 마음을 두겠습니까? 그래서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의 시각에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도 어려움도 결국 지나가는 것이지만 심판은 세상을 영원한 멸망에 있게 함을 생각할 때 신자로서 굳게 잡아야 할 것에 무엇인가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5절에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합니다.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라는 말은 우리의 연약함을 돌아보고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연약함과 처지를 이해하신다면 왜 우리를 돕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돕지 않으시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세상을 기준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의 연약함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껏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연약함을 받아주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은 법대로 우리를 처리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실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연약함을 받아주시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오시고 우리의 모든 짐을 대신 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세상 것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께 받은 것이 없다’는 어리석은 불만을 내뱉지 마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누구를 주셨는가를 헤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사랑 타령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삶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인가를 묵상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굳게 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을 보면서 받은 것이 없다라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연약한 나를 위해 내어 놓으셨음을 발견하고 그 사랑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를 굳게 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 앞에 완전히 항복한 자로 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생각과 관심을 그리스도께 집중할 때 가장 복된 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나 자신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아는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힘쓰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놓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를 쓰십니다. 때문에 믿는 자로 사는데도 불구하고 고통과 어려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고통과 어려움의 삶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 허락하신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자비하심과 긍휼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시기 위해 허락하신 필수적인 과정인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는 말을 하는데, 이 말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 말한 ‘때’를 자기중심에서 이해해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어려울 때, 힘든 때, 도움이 필요할 때 하나님은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도우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도우심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때를 따라 도우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를 내가 정하고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을 하나님은 이미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린 다만 하나님께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것에 관심을 두고 다른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삶의 형편을 나아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항복한 자로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려움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그리스도를 굳게 잡기를 소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때를 따라 도우신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믿음의 도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좋은 것을 주기를 기뻐하십니다. 그 좋은 것이 무엇인가는 심판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나를 살리는 것, 그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이고 좋은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찌꺼기로 남아있는 세상에 대한 집착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조금씩 씻어지면서 세월이 지날수록 예수님에게 점령되어진 심령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세계가 여러분이 영원히 거할 세계, 여러분이 돌아갈 본향으로 한없이 여겨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신자의 행복일 것입니다.
신자로서 신앙의 기쁨과 행복을 맛본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최고의 행복자이며 복을 누리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복의 참맛을 안다면 어떤 어려움과 고통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굳게 잡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