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브리서 5:1-7)
<설교>
사람들은 생활 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갖추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필요치 않는 것도 자신을 과시하고 자기만족을 위해 갖추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처럼 마음껏 원하는 대로 갖추고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돈에 목말라하는 지도 모릅니다.
많은 것을 갖추어 두고 살면 뭇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으로 완벽하게 갖추었다고 해도 단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갖추지 못했다면 헛일일 뿐입니다. 반면에 세상의 것은 갖추지를 못해서 초라하게 산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갖춘 자라면 그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갖춘 자로 산다는 것은 아주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대제사장’이라는 호칭이 나옵니다. 이는 구약에 있었던 직책이기도 하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 무슨 일을 위해 세상에 오셨는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대제사장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이 필요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들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한 것이고 그 일이 대제사장과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나와 제사를 드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제사에 왜 굳이 대제사장이라는 인물이 필요했겠습니까? 그냥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 제사를 드리도록 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제사에 있어 대제사장이라는 백성의 대표자가 필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께 나오면 모두 죽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처지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대제사장이라는 대표자를 세워서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 모두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와 제사를 드리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을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의 처지를 살피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즉 우리의 대표자로 예수님을 세우신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대표자가 필요합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처럼 우리의 처지가 하나님께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우리의 처지를 살피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긍휼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 긍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확증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증거되고 부각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는 이 말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이 담겨 있음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 도우심을 세상을 보면서 확인하고 확증하기를 즐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의 문제를 더 힘들게 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왜 간증이라는 것을 즐겨합니까? 간증에는 뭔가 특별한 체험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특별한 체험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신 증거물로 여기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특별하지 않게 여겨지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평가절하하게 되는 것입니다. 뭔가 극적인 체험을 한 사람보다 하루하루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 같은 자신의 삶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간증이라는 것을 좋아하지를 않습니다.
마귀도 예수님을 이러한 문제로 시험을 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하나님이 천사들을 동원해서 다치지 않도록 지켜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이 문제에 빠져 있습니다.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다치지 않는 기적을 체험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떤 어려움에서도 지켜줘야 그것이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가 노리는 것입니다. 신자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게 훼방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죄인된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을 하나님과의 화목에 있게 하는 것이 대제사장의 역할일 뿐 이스라엘의 발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을 믿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을 만나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짊어지시고 친히 자신을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를 구원에 있게 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오셨음을 알아주는 것으로 신자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처지가 어떠했기에 대제사장으로 오셔야 했는가를 깨달아야 하고, 그분께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오신 것은 우리의 대표자로 오신 것임을 말씀드렸지만, 사실 우리는 죄인들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즉 예수님은 기껏해야 죄인들의 대표자로 일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낮아지심이고, 이 낮아지심이야 말로 우리에게는 한없는 은혜며 사랑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는 은혜와 사랑과 긍휼하심이 무궁무진한대 어디에서 무엇으로 사랑과 긍휼을 체험하겠습니까?
이 말씀은 어려움에서 ‘하나님이 내편인가?’라는 의심을 갖고 있는 신자들에게는 큰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은 편함이나 권세, 부요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고난과 낮아지심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애당초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가 담당해야 할 몫을 예수님이 우리의 대표자로 등장하셔서 모두 짊어지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뒤로 하고 세상을 마주한 채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는 상관없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대표자라는 것은, 예수님이 계셨던 그 자리에 우리가 나아가야 함을 뜻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가신 그 길에 우리 역시 있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대표자라고 해서 예수님이 홀로 가신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고 우리는 딴 동네에서 내 멋대로 놀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표자가 간 그 길이야 말로 생명의 길이니 만큼 우리 역시 그 길을 가기 위해 대표자를 끊임없이 바라보고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을 보기가 힘든 것이 지금의 세태입니다. 예수님을 말하면서 예수를 세상의 자신들의 삶에 끌어들이기 위해 분주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끌어 들이기 위해 온갖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무엇이 신앙인가를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근거를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오셔서 어떤 고난을 받으셨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겪게 되는 고통에서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승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봄에 있음을 아시고 예수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