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강) 히브리서 5:7-10 고난과 순종

<본문>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브리서 5:7-10)

<설교>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오신 것은 우리들의 처지가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가실 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죄인된 우리를 대표하기 위해 죄인의 자리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께 나간 것이고,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몫인 사망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신앙생활에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가볍게 여겨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십자가의 은혜는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만큼 은혜에서만 머물지 말고 더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사실 신자가 은혜에서만 머물지 않고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뭔가 열심히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사실은 은혜의 자리에 있을 때 은혜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열매임을 알아야 합니다. 섬김, 겸손, 희생, 온유, 이런 모든 것은 은혜 안에 있을 때 맺어지는 것들이지 우리의 열심과 의지로서 맺어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은혜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십자가의 은혜를 안다고 자부할 것입니다. 또 은혜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생각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은혜에 머물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함으로써 자신을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죄인 됨을 아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은혜는 자기 문제를 바로 직시하고 자신의 죄의 상태를 깊이 깨달은 신자들에게만 부각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은 자신의 죄인 됨을 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죄인 됨을 안다면 자신의 무가치함과 무능력함도 역시 절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돕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죄인된 우리의 대표자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돕기 위해 어떻게 일하셨습니까? 7절을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말씀하는데 과연 누구를 위한 눈물이고 간구겠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에 있어서는 아무런 힘도 없는 연약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일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은혜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의 구원에 대해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구원을 내가 보답할 수 있는 수준 낮은 것으로 끌어 내리는 것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 없는 귀한 것이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구원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8-10절을 보면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은 구원의 완성을 뜻합니다. 즉 고난을 받으실 이유가 없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심으로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근원은 예수님뿐이며 때문에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곧 순종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 아시는 내용입니까? 사실 예수님이 구원의 근원이시라는 것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그런데 인정하면서도 항상 다른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근원이시지만, 그리고 예수님으로 구원이 완성되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서 신앙의 행동이 있어야 자기 구원이 완벽해진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행위를 기준하여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가령 자신의 행위를 보면서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데도 과연 구원받은 사람인가?’라는 의심을 갖는다고 합시다. 이 사람은 구원의 근원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가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근원이시라는 것은 자신의 행위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착함이나 의로움을 보시고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가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는 조건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예수님의 순종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이것이야 말로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이러한 신앙에 머물 때 자신의 악함을 보면서 구원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처럼 악한 자를 구원하신 은혜에 대한 감사함이 더욱 커질 뿐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저자는 왜 어려움에 있는 신자들에게 예수님의 고난과 순종을 얘기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순종의 결과로 주어진 것임을 말함으로써 어려움에 있는 신자들에게 그들의 어려움이 애매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주어진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에 참여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순종이 구원을 이룬 것처럼 어려움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때 그 순종으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열매가 있을 것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배우는 자입니다. 고난을 배우고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럴 때 어떤 일에서도 믿음으로 굳게 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