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브리서 5:8-10)
<설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보내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오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의 처지가 대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야가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반응은 냉랭할 뿐입니다. 즉 세상은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보다는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메시야를 원하고 기다렸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을 원하십니까?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삶을 풍족하게 만들어 줄 예수님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 즉 지금의 어려움과 힘든 문제에 예수님이 와 주시기를 기대하고 원하고 있지만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의 일은 다른데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죄인된 인간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만나시기 위해 대제사장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단절된 존재로 영원한 멸망에 처해졌어야 함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제사장으로 오셨다는 것은 큰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10절의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사장직을 ‘멜기세덱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차란 족보, 계통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이란 말은 창세기 14장에 처음 등장합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아브람의 조카 롯이 그돌라오멜과 그의 연합군에 의해 붙들려 갔을 때 아브람이 소수의 군사를 모아서 그들을 뒤쫓아 가 치고 롯을 구해올 때 멜기세덱을 만난 내용이 나옵니다. 이 멜기세덱을 살렘왕이라고 하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이 멜기세덱이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람을 만날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그런데 제사장직을 역할을 두고 보면 멜기세덱의 이같은 행동은 제사장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하여 제물을 들고 하나님께 나가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14장에서의 멜기세덱은 제사장이면서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편에서 아브람을 축복하기 위해 떡과 포도주를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제사장의 역할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제사장의 모습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고난과 속죄 희생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에서 쉽게 떠올리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과 죽으심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람이 만난 하나님의 대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서는 그같은 고난과 희생 죽으심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 아브람을 축복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러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오셨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고난과 죽으심만을 보지 말고 승리와 축복까지 함께 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고난과 희생, 죽으심만을 보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일은 죽으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지금은 하늘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영광의 면류관을 쓰는 그 날까지 예수님의 일은 중지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승리의 자리에 앉혀 놓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에 있는 신자에게 멜기세덱 반차를 좇아오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고난과 어려움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생각하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는 멜기세덱 반차를 좇아오신 예수님은 신자가 어떤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실패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고 기어코 승리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힘주시고 도우시며 축복하시는 분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어떤 일에서든 낙심치 말라는 것이 히브리서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는 것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는 것이고, 승천하시고 하늘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는 것을 뜻합니다. 때문에 고난 받으셨던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다면 우리 역시 결국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위로이며 힘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우리도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세상의 삶이 어려움과 고통으로 다가온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인내하고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승리입니다.
신자는 땅이 아니라 위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골 3:1-3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신자라면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시는 위엣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다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땅에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못남과 더러움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말하고 하늘을 말하면서도 우리의 시선을 땅에서 떼어내지를 못합니다. 이런 우리를 포기치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관심과 시선을,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돌려놓기 위해 고통과 어려움이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영광의 나라에 합당한 성품으로 만들어 놓기 위해 그렇게 일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주시고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주시기 위해 고통과 어려움의 삶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어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향한 시선을 포기한다면 그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삶이 힘들수록 필요한 것은 위엣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에서 나를 단련하시고 훈련시키시면서 정금같은 신앙으로 새롭게 나오게 하시고 마지막에는 영광의 나라에 영원히 거하게 하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힘이고 위로일 것입니다.
신자는 실패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약속을 능히 성취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작정 고난과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오직 자신의 일만을 생각하는 기도일 뿐입니다. 어떠한 삶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오실 것임을 믿는다면 기도는 달라질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낙심치 않고 위엣 것을 생각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우리 앞에 멜기세덱이 반차를 좇은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사탄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주를 의지하고 주를 믿으며 사는 것이 곧 승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어떤 분위기로 흘러가든 거기에 개의치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할 일은 오늘도 내일도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위엣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승리를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신자의 힘이며 위로로 자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