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 히브리서 5:11-14 젖과 단단한 식물

<본문>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 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브리서 5:11-14)

<설교>

많은 사람들은 신앙이 자신을 지켜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신앙은 내 개인의 보호와 연계하여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은 나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도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앙을 삶의 문제 해결과 연계하여 생각한다면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에는 혼란과 무너짐을 경험하게 될 뿐입니다. 이러한 신앙에서 필요한 예수님은 다만 자신의 문제를 잘 풀어주는 존재일 뿐 다른 것에는 관심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말합니다. 그냥 예수가 아니라 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실 때 제사장직을 수행하실 분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냥 보내시면 될 일을 왜 제사장직을 수행하시는 분으로 보내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들에게 필요한 분이 제사장직을 수행하시는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직은 삶의 문제 해결과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을 대표로 하여 제사를 드릴 때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죄 문제였고 거룩의 문제였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삶에만 치우쳐 있는 신앙이라면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신자라면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분명 큰 은혜와 관심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의 문제보다 더 큰 중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영혼의 문제입니다. 70, 80으로 끝나는 인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원의 문제가 중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 필요한 오직 하나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이기에, 그 믿음만이 나를 살리고 영원한 세계로 이끌어 가기에 믿음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러한 관심에 머물러 있습니까? 십자가에 피흘리고 죽으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문제보다, 돈버는 것보다, 아이들 키우며 살아가는 문제보다 더 크고 중대한 관심거리로 존재합니까?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다시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말하되 관심은 세상에 머물러 있는 이것을 본문에서는 어린 신앙으로 표현합니다. 11절을 보면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고 말합니다. 멜기세덱에 관해 듣는 것이 둔하여 어렵다는 것은 멜기세덱에 관한 말이 어렵다거나, 듣는 자가 지식이 없어 이해력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둔하다는 것은 생각과 사고방식이 세상적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예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에 관한 얘기는 세상에서 흔히 일어나고 볼 수 있는 일상사가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도무지 볼 수 없는 하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세상에 있는 자는 멜기세덱에 관한 얘기를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멜기세덱에 관한 얘기란 멜기세덱의 무슨 신상문제가 아니라 창세기에 있었던 얘기를 뜻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을 구출하고 돌아올 때 멜기세덱을 만난 그 일을 둔한 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만나 자신의 승리가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게 됩니다. 318명의 군사로 승리한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만남으로 승리의 실상을 알게 됩니다. 전쟁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입니다. 승리의 근거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려운 얘기는 아닐 것입니다. 누구든 승리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구원에 대해 우리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하면 이해를 못합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무런 공로도 되지 못하고 복의 근거도 될 수 없음을 말하면 이해를 못합니다. 구원에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는 다만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할 뿐임을 말하면 이해를 못합니다. 그래도 뭔가 해야 하지 않느냐는 반문을 합니다. ‘뭔가 해야 하지 않느냐?’는 이 말이 곧 자신은 뭔가 할 수 있는 자임을 의지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자기 부인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두려는 것임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이것을 두고 어린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머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지 오래 되어서 이제는 남을 가르칠 만한 수준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상태에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여러분 자신을 생각하며 듣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모두 오랜 세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면서 수많은 설교를 듣고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을 가르칠 만한 수준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러합니까? 이런 말을 하면 ‘나같은 사람이 무슨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가? 나는 성경을 아는 것이 없다’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성경을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내용을 모두 알고 있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저는 성경을 알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여러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가르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지 성경의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을 가르칠만한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을 뜻합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가르치면 되는데 아직 말씀의 초보조차 모르는 수준이어서 되레 남에게 말씀의 초보부터 배워야 할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먹을 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단단한 식물이란 멜기세덱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것을 못먹을 자라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왜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유는 자신의 죄인 됨을 알지 못하는 것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라는 자리에서 탈출하려고 할 뿐,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보지를 않습니다. 예수를 믿었으니 이제 의인이라는 것만 고집하면서 죄인이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할 뿐입니다. 이들에게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점차 희미해지는 분일뿐입니다.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한 자들은 자신이 높임 받기를 원하고 칭찬 받으며 가능성을 인정해주고 열심히 하라는 말을 듣고자 합니다. 이들은 아무것도 않아도 복을 누리며, 구원에 전혀 지장이 없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어린 신앙이며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4:12절에서 그 힌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말씀은 나의 전부를 쪼개며 드러내며 내 속에 숨겨져 있는 마음의 생각과 뜻까지 감찰하십니다. 즉 나의 모든 것, 숨겨져 있는 모든 실체가 말씀에 의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자신의 악함과 죄가 모두 드러나고 결국 나같은 죄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주님의 은혜만 바라고 사모할 뿐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은 말씀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끝까지 행함을 고집하며 행함에 중점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무엇을 하든 그것을 자신의 공로로 보지 않습니다. 다만 은혜의 결과이며 믿음의 열매일 뿐입니다. 말씀을 경험했기에 이런 신앙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인간의 행위에 따라 상이 주어지며 복이 주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열심히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고난과 어려움이 계속된다면 그 믿음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보여질까요? ‘하나님 열심히 믿었는데 왜 이런 일이 있게 합니까?’라는 반문과 의문을 보이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어린신앙의 수준인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의 고난과 어려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초보적인 신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러한 신앙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히브리스서가 말하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고 말합니다.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장성한 신앙은 자신의 고난과 어려움에서 주님을 보게 됩니다. 고난이 자신의 행위나 신앙의 좋고 나쁨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일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구원의 근거를 예수님에게만 둔다면 어떤 삶에서든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말씀의 초보에 머물지 마십시오. 말씀을 경험한 자로서 구원의 깊은 의미를 깨닫기 바랍니다. 이러한 신앙에서 기쁨과 평화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