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히브리서 1:4-5 아버지와 아들

<본문>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히브리서 2:1-4)

<설교>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의 위대함에 대해 말씀을 드렸지만, 이 말씀이 사실 우리에게 별 흥미를 끌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들이 새로운 내용이라고 말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미 익히 알고 있고 또 인정하고 있는 내용들을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기에 흥미가 반감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오늘 본문의 내용 역시 여러분의 흥미를 끌만한 내용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4절을 보면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 남은”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뒤에 보면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아버지가 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맏아들이라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뻔한 내용이지 않습니까? 어느 누가 예수님이 높은가 천사가 높은가라는 문제로 고민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천사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것은 기독교의 상식이며, 세상 사람들도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본문은 그러한 내용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뻔한 내용을 왜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것일까요? 우선 염두에 두셔야 할 것은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라는 것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믿음의 문제가 충족된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에 대해서는 세상도 알고 있습니다. 아마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 알고 있는 것만큼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믿는자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즉 예수를 아는 앎과 신앙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귀신도 알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내용이 나옵니다. 결국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안다는 것이 신앙의 초점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신앙의 초점이겠습니까? 교회에 출석하는 것입니까?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입니까? 그러한 것들로도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마태복음 8:29절에 보면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외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귀신 들린 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알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자신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세상에 오셨는가?’라는 문제와 나와는 하등에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멸망의 이유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안다는 것만으로 신자로 일컬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불안감을 드리거나 자신에 대해 의심하게 할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고 참된 믿음에 거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하심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깊이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신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다 아는 뻔한 내용이라고 해서 그냥 지나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너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고 있으냐?’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들답게 섬기고 있는가?’를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천사보다 뛰어난 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다면 아는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보다 귀하신 분이시고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죄인에 불과한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아들을 희생하셔서까지 저와 여러분을 사망에서 건지신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귀하신 아들을 잃어버린 일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들을 잃으신 아버지의 고통을 전혀 도외시 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아들을 보내실 때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전혀 알지 못한 어떤 존재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무덤덤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들을 잃으신 아버지의 고통을 말할 때 대개 ‘아들은 결국 다시 살아나셨지 않습니까?’라는 말로서 아버지의 고통에 무관심할 때가 많습니다. 사실 어찌 생각하면 예수님이 다시 사셨으니까 아들을 잃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여러분의 아들이 다시 살 것을 전제한다고 했을 때 그 아들을 실컷 때리고 죽이실 수 있겠습니까? 고통을 당하며 죽어가는데 ‘다시 살 것이니까’라고 하면서 아들의 고통에 무덤덤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신이시기 때문에 아들에 대한 사랑이나 아들로 인한 고통과 같은 느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5절에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라는 말씀을 보면 내가 너를 낳았다는 표현을 씁니다. 이는 문구대로 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낳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하나님이 아들을 낳았다는 뜻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여자라는 말입니까?

사실 낳는다는 말은 죄를 범한 인간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에서의 낳는다는 표현을 인간이 자식을 낳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15절을 보면 “그리스도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는 말을 합니다. 또한 빌레몬서 1:10절에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는 말을 보면 ‘낳았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자식을 낳는 것과는 다른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본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는 말이 그와 같은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알고 있는 낳았다는 표현으로 이해하여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낳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깊은 관계를 의미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는 말 역시 하나님과 예수님의 깊은 관계를 의미하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계에 있는 예수님을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위해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 깊은 마음을 두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고통을 깊이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에 몸담고 살아가면 우리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욕심껏 살아가면서도 애통함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죄로 인해 아들을 버리신 아버지의 고통에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것을 두고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고통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의 정체는 너무 엉터리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모든 생각은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 근처에도 가지 않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죄 때문에 오셨습니다. 이것을 아신다면 예수님 앞에는 우리의 죄 문제로만 나와야 합니다. 혹시 예수님이 자식 성공 문제, 교회 부흥 문제로 오셨다면 그러한 문제를 들고 오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문제로 오지 않으셨음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수님은 아들이십니다. 여러분의 전부는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아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누군가가 세상 전부를 줄테니까 아들을 포기하라고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물론 돈을 보는 자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이 전부인 사람은 세상 전부를 주다고 해도 아들과 바꾸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십니다. 그처럼 귀한 분을 여러분을 위해 버리셨습니다. 이점을 언제나 마음에 품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부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더 달라고 구하겠습니까? 예수님 외에 달리 구할 것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관심 둬야 할 분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버리신 그 일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절박한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 제발 바쁘게 살지 않게 해주세요. 바쁘게 살아서 예수님을 잊을까 두렵습니다’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이며 아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계속해서 예수님보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간다면 주어질 것은 멸망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도 좀더 우리 마음을 깨워서 그리스도 위에 굳게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인줄로 압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얻는다 할지라도 예수님께 관심이 없이 산다면 모든 것은 헛될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 지혜가 여러분께 있기를 바랍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든 이 정신만은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살아갈 때 불안과 염려를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어떻게 하나?’하며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는 이유도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오셨고 또 누구신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면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께 세상을 향한 꿈과 소망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한 꿈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을 보내셔서 확증하시고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고 믿는다 하면서 여전히 세상에 대한 소망과 꿈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분명코 예수님을 아는 모습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상고하면서 여러분의 관심을 그리스도께 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여러분의 죄인 됨에서 생각하시고 귀한 아들을 우리를 위해 버리신 아버지의 아픔에 대해서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전부는 그리스도라는 결론을 내려 보시고 남은 모든 인생이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 살아가기를 소원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