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강) 히브리서 6:7-8 땅과 열매

<본문>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브리서 6:7-8)

<설교>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 사림들입니다. 이유는 어떤 사람도 자기에게 붙들린 삶에서 해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갇혀 삽니다. 자기가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되고 담이 되어서 평생을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자기를 벗어나 예수님께 마음을 둔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존재의 마음이 예수님을 향하게 되고,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마음이 분명존재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작품이지 우리의 공로는 아닙니다. 바로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신자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중심에서 해방되지 못한 존재가 믿음으로 신자답게 산다는 것은 투쟁의 결과입니다. 여러분, 신자답게 살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해서 마음먹은 대로 쉽게 되어지던가요? 마음먹은 대로 살려고 하지만 항상 나의 육신이 나를 방해함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탄식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투쟁도 없이 갈등도 없이 신앙생활을 한단 말입니까? 만약 자신과의 아무런 투쟁도 갈등도 없다면 이미 자신에게 흡수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즉 자신을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신앙의 의미를 모르고,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의 뜻도 알 수 없고 관심조차 두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본문 역시 이러한 모습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7-8절)는 말씀 역시 지난주의 내용처럼 잘못 이해하기 쉽습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중심에는 ‘자기 구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 구원을 중심으로 본다면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합당한 채소를 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채소를 내기 위해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땅이 비를 흡수했을 때 할 일은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쓰지 못할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받고 마지막은 불사름이 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이 역시 중점은 저주를 받지 않고 복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신 뜻이 무엇이며 과연 그 뜻에 부합된 자로 살아가느냐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에 부합된 자로 살아가느냐가 본문의 중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신 것은 완전한데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는 오직 완전한 데, 즉 그리스도 안에서만 맺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다면 거기서 나올 것은 가시와 엉겅퀴밖에 없습니다. 전혀 쓰지 못할 것만 맺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완전한데서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완전하신 분 안에서 뭘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이미 예수님으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졌는데 우리가 보태야 할 행함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분 안에서의 우리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완전하신 분을 의지하면서 그분의 공로와 은혜를 높이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입니다. 완전하신 분 덕분에 완전함을 입고 있음을 바라보면서 그분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이 여러분을 부르시고 완전하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비를 맞았다면 그에 합당한 열매를 내어야 합니다. 합당한 열매는 하나님의 아들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나는 없고 주님만 살아있는 삶을 뜻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열매까지도 내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에 있을 때 자연히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자의 특징입니다.

사람들은 뭔가 예수님을 위해 해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골몰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잘못된 것이 없지 않는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위해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은 결국 지금의 삶에서 분리된 다른 일을 꿈꾼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문제 삼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특별히 예수님을 위해 하는 것, 나를 위해 하는 것으로 구분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해 뭘 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특별한 행동을 하기를 꿈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특별한 행동을 의미있게 보게 되고 흔히 일상사라고 말하는 삶에 대해서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소홀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위 예수님을 위한 특별한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서로 비교하고 판단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예수님을 위한 특별한 삶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신자는 모든 삶의 바탕에 그리스도가 계시면 그것이 곧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말합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은 그냥 일상생활입니다. 즉 사는 것 자체가 항상 하나님의 영광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홀히 여기면서 예수님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고 한다면 그들은 일을 두고도 그 비중을 비교할 뿐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큰 일을 하면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판단될 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신 이유는 예수님을 위해 특별한 일을 하라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리스 도안에서 완전하신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를 자랑하고 높이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여러분에게 은혜를 맛보게 하시고 말씀을 능력을 알게 하시고 사랑과 긍휼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무능력을 알고 다만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만 높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에 인간이 생각하는 특별한 모습을 삽입시키지 말기 바랍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껏 자랑하고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에 실패했기에 결국 가나안 땅에서 내어 쫓김을 당한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합당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욕보이지 마십시오. 은혜를 맛보게 하시고 사랑과 긍휼을 알게 하신 뜻을 생각하면서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그리스 도안에서 여러분에게 맺어져야 할 열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