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강) 히브리서 6:13-20 하나님의 맹세

<본문>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6:13-20)

<설교>

우리는 지금껏 ‘믿음은 우리가 힘쓴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11절의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말고 말하는 내용을 보면 그 분위기가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부지런을 나타내라는 것이나, 게으르지 말라는 것이나,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의 느낌이 우리의 노력과 힘씀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사실 믿음이 우리가 힘써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부지런해야 할 이유가 없고 본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내가 부지런하지 않아도 부지런하신 하나님이 다 책임지실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분명 구원은 우리가 힘써서 되어지는 것이 아닌데 우리에게 부지런할 것과 게으르지 말 것, 본받아야 할 것 등을 가르칠 필요가 뭐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을 때 나타나는 생각입니다. 모든 행위의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함으로써 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하느냐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 대해 여러 가지 오해와 혼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말할 때 ‘우리가 하지 않아도 다 된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구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초점을 내가 아닌 하나님께 두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님을 봄으로써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이 하늘로 가셨고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즉 예수님은 육신으로 우리와 함께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보면서 하나님을 보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예수님은 세상에 제자들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셔서 제자들을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오래 참으며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부지런은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뤄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부지런조차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는 차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부지런, 열심, 인내, 이런 모든 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힘으로 여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시는 흔적들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부지런하다면 내가 믿음이 좋아서 부지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러한 마음을 주신 결과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신자에게는 신앙의 열심조차도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 부지런과 열심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부지런하고 열심을 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힘쓰기 때문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지만 아브라함의 신앙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맹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런 내용을 대할 때마다 ‘그러면 내가 열심을 낼 이유가 뭔가?’라는 의문을 가지는 것은 열심 자체를 자신의 의도에 따라 낼 수도 있고 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고, 또한 열심의 의미를 내 노력으로 뭔가 이루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다면 내가 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말할 때 먼저 생각나는 것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아들까지 제물로 바치는 것에서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열심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열심도 아브라함이 복을 얻는 근거는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어떤 행위의 복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자의 행위 자체를 묵살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신의 행위를 의로 여기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 행위가 있으면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란 것입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행하도록 합니다. 즉 믿음은 신자의 행위를 동원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것으로 그리스도가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4:2절에 보면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2:21절에서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는 말을 합니다. 문맥으로 본다면 사도 바울과 야고보는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두고 본다면 바울과 야고보의 말은 서로 만나서 완벽한 믿음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은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위로 의를 얻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고, 야고보 사도의 말은 이삭을 바치는 행위로써 믿음이 증거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이삭을 바치는 행위가 아브라함 스스로 만들어낸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맺어진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행위로써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니며 또한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됩니다. 즉 의의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바치는 행위까지 이끌어 내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면 그것은 아브라함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능력을 높이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맹세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어떤 사람으로까지 만들어 가시는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맹세하셨다는 것은 부르시고 그냥 팽개쳐 두신다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자에 대한 끊임없는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신자라면 신앙은 막연히 천국만 바라보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자로 날마다 살아가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날마다 계속되어야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스스로의 힘으로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굳이 맹세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부르시고 명령하시면 그것으로 다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머지는 아브라함이 알아서 살아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물론 모든 사람은 스스로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힘쓰는 사람일 뿐입니다. 이런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고쳐 가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열심이 동원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포기되지 않는 열심을 드러내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맹세인 것입니다. 이 맹세에 의해 하나님은 날마다 나를 고치시고 새롭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신앙은 쉬는 것도 중지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신자에게는 ‘오늘은 내 마음대로 살고 내일부터 믿을까?’라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믿음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나를 소유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나를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해야 하며 게으르지 말아야 하고 오래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천국을 가는 용도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믿어서 천국만 가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안 믿어도 내일 잘 믿으면 천국은 간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세워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이 있음을 도외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천국 보내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독사 이삭까지 바치는 아브라함으로 고치셔서 진정으로 복된 자의 모습을 증거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항상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의 부족함과 부끄러움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다운 모습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서 그러한 자로 고침 받는 일에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안다면 이러한 삶에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