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히브리서 7:11-15)
<설교>
율법의 세계에서는 오직 ‘행함’만이 진리로 유통될 뿐입니다. 행함이 보이지 않을 때는 가차 없이 ‘믿음 없음’이라는 판결을 내리게 되고, 반대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행함(착한 일, 기도, 헌금 구제 등등)이 있을 때는 ‘믿음 있음’이라는 판결을 내리며 참된 신앙인으로 대우를 해주기도 합니다.
이런 분위기의 교회에서 진리는 축출의 대상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행함으로 말미암아 참된 신앙인으로 구별되어 대우를 받던 모든 것이 진리에 의해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다만 예수님을 높일 뿐, 그 어떤 인간도 높이지를 않습니다. 인간은 높임 받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진리를 빙자하여 행함을 앞세워 높임을 받고자 한다면 예수님의 거부대상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행함에 대한 미련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행함이 없는 신앙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행함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당연한 진리로 알고 있기에 결국 행함에 신경을 쓰게 되고 신앙을 위해 행함에 열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은 행함으로 나타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성령의 주장하심으로 말미암아 행하게 되는 것들이지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내는 행함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설사 어떤 행함이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을 자신의 행함으로 끌어 당겨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이 다스리시고 간섭하신다는 증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을 때 세상의 반응은 ‘지켜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지킬 것을 원해서 율법을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킨 결과를 구원에 두었던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킴으로 신앙에 거할 수 있다고 여겼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이러한 사고방식이 수천 년의 세월을 따라 그대로 흘러온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행함에 모든 가치를 두려고 하는 인간의 본성으로 인한 자연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본성을 파고 들어오는 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인간의 본성에 부합된 내용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성과 부딪히고 거부당할 수밖에 없는, 율법의 세계에서 볼 때는 이단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내용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설사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하고 비기독교적인 것이라며 비판을 한다 해도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가 높여지고 증거되는 것으로 증거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 그 마음을 둘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레위 계통의 제사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2절에서는 제사 직분이 변역 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이 멜기세덱 반차를 좇은 별다른 한 제사 직분으로 변역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사 직분이 변역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는 온전함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은 율법에 의해 세워진 것입니다. 반면에 멜기세덱 반차를 좇은 별다른 제사장 직분은 율법과 상관없이 주어진 것입니다. 결국 율법에 의한 제사 직분으로는 온전케 할 수 없으므로 율법과 상관이 없는 한 제사장이 세워짐으로 우리를 온전케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율법은 인간은 온전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서 온전해 진다거나 거룩해진다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12절은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제사 직분은 율법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한 제사 직분이 바뀐다면 그것은 율법이 바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구약의 방식대로 율법을 지켜야 할 행함의 부분으로 인식하고 율법을 지킴으로 거룩을 얻으려고 하는 발상이야 말로 복음을 말하면서 복음을 밀쳐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왕 바뀔 율법이라면, 처음부터 우리를 온전케 할 수 없는 율법이고 율법과 상관없는 제사장이 따로 준비되어 있던 것이라면 처음부터 율법으로서의 제사장이 아닌 멜기세덱 반차를 좇는 제사장을 세우면 안되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레위 계통을 제사장을 세우신 것입니까? 그것은 복음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복음이 안고 있는 영원한 구원은 인간의 행함과는 전혀 상관없이 주어진 은혜임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될 수 없음을 선포하기 위해 율법을 주시고, 율법에 의한 레위 계통의 제사장을 세우신 것입니다.
13-15절을 보면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별다른 한 제사장으로 오셨는데 레위 지파가 아니라 유다지파로 오셨습니다. 유다 지파는 율법상 제사장직과는 상관이 없는 지파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신 예수님이 그러한 유다 지파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제사장이면서도 율법과 상관이 없는 유다 지파로 오심으로써 율법은 지켜야 하는 문제가 아님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레위 지파로 세워진 제사장에 속한 자가 아니라 유다 지파로 오신 예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할 신앙의 중요한 행위로 받아들인다면 깨끗이 씻긴 돼지가 다시 더러운 곳에 눕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인해 거룩함에 이릅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온전하게 하고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 안에서는 지켜야 하는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한없는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베풀어지는 것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의 신자는 베풀어지는 것에 대해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는 다른 요구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말하면서 신자가 지켜야 할 여러 가지 규칙을 세운다면 내 입술로 고백하는 은혜를 뒤엎는 것일 뿐입니다.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이스라엘을 온전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어떤 율법 조항을 지킨다 할지라도 온전케 되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물을 몇 천 마리 잡아 바친다고 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케 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이, 있다면 죄 가운데서 뒹굴며 살았던 우리가 예수님이 제물 되심으로 온전케 되어진 것입니다. 이 은혜를 누리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가 바로 복음을 알고 복음을 안고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지켜야 한다는 것만큼 어리석고 부질없는 것이 없음을 아시고 이미 주어진 은혜로 감사함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신자의 행복입니다. 이러한 행복을 잃지 않는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